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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17 제1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빛의 도시 광주에서 아시아문학페스티벌이 열립니다. <아시아에서 평화를 노래하자>라는 주제로 시와 소설을 읽고, 독자와 함께 얘기하고, 아시아의 깊은 밤하늘과 별들에 대해 노래하고자 합니다. 아시아 각국의 저명한 작가들과 한국의 작가들이 함께 축제에 참여할 것입니다.

  • 2017 제1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 2017 제1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초청작가

특별초청 작가

월레 소잉카Wole Soyinka(나이지리아)
주요경력
극작가, 시인, 소설가
아프리카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1986)

월레 소잉카는 노벨문학상(1986년)을 받은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으로 현대 아프리카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검은 대륙을 고발한 흑인 문학의 승리” 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는 작가다.

월레 소잉카는 노벨문학상(1986년)을 받은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으로 현대 아프리카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검은 대륙을 고발한 흑인 문학의 승리”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는 작가이다. 희곡, 시, 소설, 자서전,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그의 대표 영역은 희곡이다.

소잉카는 1934년 나이지리아의 아베오쿠타에서 요루바 부족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영국 식민지였는데, 그는 런던대학교 분교로 현지에 설립된 이바단 대학을 졸업하고 1954년 영국의 리즈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런던의 로열코트극장에서 배우 겸 연출가로 일했다. 나중에 나이지리아로 돌아가 아프리카 드라마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 귀국하여 국립극장 ‘가면 1960’을 설립했고, 나이지리아의 독립을 축하하는 첫 번째 희곡 <숲의 춤 A Dance of the Forests>을 썼다. 1960-64년 아프리카의 중요 문예지 <블랙 오르페우스 Black Orpheus>의 공동 편집인으로 일했고, 1960년부터는 여러 극단을 지도하면서 나이지리아의 몇몇 대학에서 문학과 희곡을 강의했다. 1965년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방송을 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나이지리아 내전(1967-1970년) 기간 중에는 정전을 촉구하는 기사를 썼다가 비아프라 반군에 동조한다는 죄목으로 22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글을 써서 나중에 ‘감옥으로부터의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감옥의 경험은 그의 책 <그 남자는 죽었다>에 잘 녹아 있다. 1970년 출소 후 영국으로 망명해 1973년 리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후에도 나이지리아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에 적극 가담한 소잉카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정치적 망명자로 살아야 했다. 마지막 군사정권이던 아바차 정권(1993-1998년)은 궐석재판을 통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에 민정이 회복되자 1999년에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소잉카는 대학 교수로서 강의와 저술 활동에 전념했고, 2010년에는 인민민주전선동맹(DFPF)의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2017년에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자신의 미국 영주권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소잉카 문학의 본질은 불의와 치열하게 맞서 싸운 그의 삶이 보여 주듯 ‘저항’이다.

예술의 역할에서도 그는 현실 참여를 강조한다. “무대 위의 예술도 그 자체로 예술 활동이기는 하지만, 사회에 투영되어 해석되는 예술이 훨씬 더 적극적인 활동입니다. 미술관과 무대, 콘서트홀에 가둬 놓아도 예술은 예술이지만, 원초적인 수준의 예술 활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고단계의 예술은 사회 일부가 될 때, 그때 진정한 예술이 되고 위험한 물건이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예술의 사명입니다. 그러지 못할 때 예술은 혼잣말에 불과하고, 혼잣말이 참된 의미에서 예술 활동이 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안토니오 꼴리나스Antonio Colinas(스페인)
주요경력
시인, 소설가, 저널리스트, 번역가
스페인 국가시인상 수상(1982)
레이나 소피아상 수상(2016)

안토니오 꼴리나스는 자신의 시 속에서 모든 상반된 것의 갈등을 넘어 통합과 조화가 있는 충만한 공간을 상정하는데, 이러한 점은 후에 통합과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사상과 연결되는 고리를 제공한다.

안토니오 꼴리나스(1946~ )는 레온 지방의 바네사에서 태어났다.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으며, 1977년부터 1998년까지 21년 동안 발레아래스 제도의 이비사에 거주하며 작품 집필과 번역에 매진했다. 주로 시인으로 활동했지만, 수필, 평론, 번역등의 작업도 활발히 이어 갔다. 특히 1970년에서 1974년까지 이탈리아의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면서 이탈리아 문학에 대한 조예를 넓혔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탈리아 시인 살바토레 콰지모도의 시전집을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주요 시집으로는 『강의 그림자:35동안의 시, 1967~2002』 등 다수의 시집이 있으며, 소설 『남쪽에서 보낸 일 년』 수필집 『시학(詩學)이란 단어의 첫 번째 의미』, 『금강산 부근에서』 등 이 있다.

그는 이탈리아 문학을 스페인어로 옮긴 공로로 카를로 베토치 국제상을 수상하였으며 1975년 국가비평상, 1982년 국가문학상, 1999년 카스티야이레온자치구역 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국왕 카를로스로부터 ‘시민 공로 표창’을 받았다.

다양한 문학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와 외국에서의 체류 경험등은 안토니오 꼴리나스로 하여금 인간 삶의 보편적인 의미에 깊이 천착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균형이 자리하고 있다. 감정과 명상의 균형, 미학(음악적 문체, 언어적 정수를 향한 추구)과 윤리학(역사적 재앙, 합리주의의 오남용, 환경파괴의 상처들에 대한 환기)의 균형이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도덕적인 요소들이 좀 더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고원 지대(작가의 상위 영역)와 지중해권(이탈리아, 문화적 경험의 세계) 사이에서, 고전적인 것(루이 드 레옹이나 후안 크루스 같은 시인들의 계승)과 낭만적인 것(독일 낭만파나 레오파르디와의 동일시) 사이에서, 그리고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면서 말이다. 이것들이 그의 글쓰기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열쇳말이다.

또 시인은 자신의 시 속에서 모든 상반된 것의 갈등을 넘어 통합과 조화가 있는 충만한 공간을 상정하는데, 이러한 점은 후에 통합과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사상과 연결되는 고리를 제공한다.

1977년부터 1998년까지 이비사 섬에 거주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고 이후 살라망카에서 거주하고 있다.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Breyten Breytenbach(남아프리카공화국)
주요경력
시인, 화가, 인권운동가
Hertzog상(1999) 등 다수 수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글들을 씀으로서 1960년 초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추방당했었다. 1975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몰래 들어갔던 브라이튼 브라이튼바흐는 체포되어 반역죄로 9년 징역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이자 화가이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프리카어 시인상을 수상 하기도 했다.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남단 지역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보니발리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게누트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케이프타운의 미카엘리스 미술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정책)에 대해 그의 끊임없이 반대하는 글을 썼고 그로 인해 그는 1960년 초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베트남 혈통의 프랑스 여자와 결혼했다. 이 때문에 브레이튼바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1949년의 이민족 간의 결혼금지법과 1950년 부도덕법에 의해, 다른 인종과 성적인 관계를 가진 백인은 형사상 범죄자로 처벌되기 때문이었다.

1975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몰래 들어갔던 브레이튼바흐는 결국 체포되어 반역죄로 9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인 는 감옥 안에서 그의 삶의 모습을 묘사한다. 1977년에 브레이튼바흐는 또 다른 종류의 테러 혐의로 인해 다시 법원에 불려갔다. 그가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며 망명하는 “오크헬라 조직”을 통해 러시아 잠수함으로 로벤섬의 감옥을 공격하려 한다는 혐의였다. 결국 증거 부족으로 인해 그의 중대한 혐의들은 무죄로 판결되었다. 단지, 그가 편지와 시들을 밖으로 빼돌리려 했던 정황이 드러나 50달러 정도의 벌금을 물어야 했을 뿐이었다.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엄청난 국제적 개입으로 인해 그는 1982년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고, 파리로 돌아가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었다.

2000년 1월에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의 인문학대학원 교수로 초빙되었고, 세네갈 다카르의 고리 협회, 그리고 창의적 글쓰기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뉴욕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끌로드 무샤르Claude Mouchard(프랑스)
주요경력
시인, 파리8대학 명예교수
프랑스 시전문지 Po&sie의 부편집장

무샤르는 “내가 문학에서 좋아하는 것과 모순되는 것들만을 대학이 가르쳤다”라며 문학공부를 중단한 뒤 의과대학에서 3년을 수학하다가 사회참여운동에 매진하고자 의과대학도 그만둔다. 알제리 전쟁이 종료된 1962년부터 간호사로 군대 의무복무를 하였으며 1968년 혁명 당시에는 부인 Helene Mouchard-Zay와 함께 적극적으로 사회 변혁에 참여했다.

끌로드 무샤르(1941~ )는 루아르(Loire) 강이 흐르는 프랑스 중부지방의 드뢰(Dreux)에서 태어났다. (그는 차후 자신의 전기에 현재 거주지인 “오를레앙에서 죽다”라고 적히기를 희망한다.) 클로드 무샤르는 오를레앙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하게 되지만 곧 그만둔다. “내가 문학에서 좋아하는 것과 모순되는 것들만을 가르쳤다”라며 무샤르는 문학공부를 중단한 이유를 말한다. 그 후, 파리로 와서 의과대학에서 3년을 수학하다가 사회참여운동에 매진하고자 의과대학을 그만둔다. 당시는 알제리 전쟁이 한창이던 1961년 무렵이었다. 알제리 전쟁이 종료된 1962년부터 2년 동안 간호사로 군대 의무복무를 하였다. 청년 무샤르는 군대를 증오하였지만, 군인들을 치료하면서 많은 것을 군대에서 배웠다고 말하곤 한다. 제대 후 1964년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문학공부를 다시 시작하였고, 1967년 교수자격시험인 아그레가시옹(Agregation)을 통과한다. 1968년 혁명 당시에는 165년에 혼인한 부인 Helene Mouchard-Zay와 함께 적극적으로 사회 변혁에 참여한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1년 파리8대학교 교수가 된다.

문인으로서 또한 평론가로서의 끌로드 무샤르의 삶은 1966년 여러 지면을 통하여 문학평론을 비롯한 창작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또한, 1966년 학술지 Critique의 편집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오늘날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詩聖인 미셀 드기(Michel Deguy)가 창립한 문예지 PO&SIE의 편집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주요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으로는 Un grand désert d’hommes(『인간들의 거대한 사막』, 1991) 등이 있으며, 20세기 동안 인류가 마주하였던 고통들에 대한 사색을 담은 평론에세이집 Qui si je criais?(『내가 외쳐야한다면 누구에게?』)가 있다. 이 밖에도 학문적·문학적으로 다채로운 지평을 보여주는 예술평론과 산문시집들이 다수 있다. 또한, 여러 국적의 친구들과 공역한 번역서들이 있는데, 그 중 한국문학 번역서들이 다수 있다.

끌로드 무샤르는 무엇보다도 시인이다. 그리고 그는 문학연구가로서의 평론가이며 독일, 미국, 한국, 중국, 일본 등 다양한 문화권의 문학들을 옮겨내는 번역가이다. 그는 모든 문학 장르들 사이사이를 지나다니며 시와 산문을 연결하고, 문학과 예술을 연결하고, 번역과 시를 또한 연결하며 소리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수많은 통로들(passages)을 만든다. 탈-장르의 언어로 끌로드 무샤르는 오늘날 삶의 언저리로 쫓겨난 헐벗은 존재들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의 노래는 문학의 지면에서만 떠도는 소리가 아니다. 그의 노래는 현실의 시간 속에 파고드는 구체성이다. 노래는 그의 생활이며, 헐벗은 타인들의 생활이기도 하다. 그는 1969년부터 살고 있는 오를레앙의 집에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여 “인생”으로 안내해주고 있다.

잭 로고우Zack Rogow(미국)
주요경력
시인, 극작가, 문학평론가
알래스카 앵커리지 대학교 부교수
PEN번역상 수상(1994)

잭 로고우는 미국의 서부를 대표하는 [샌프란시스코 시인(The San Francisco Poets) 그룹]의 대표적 시인이다. 이들은 자유분방하고, 저항적이며, 생태주의적인 비트세대의 정신과 분위기를 갖고 있다.

잭 로고우 Zack Rogow는 뉴욕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그의 아버지 리 로고우는 35살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잭 로고우는 자신의 문학 작품의 영감을 아버지가 시작했던 문학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데서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후견인은 정치적 참여와 음악 그리고 행위 예술을 시와 혼합한 작가인 준 조던이다.

잭 로고우는 예일대학을 졸업했고, 현재 대표적인 [샌프란시스코 시인 그룹]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의 서부를 대표하는 [샌프란시스코 시인(The San Francisco Poets) 그룹]은 미국동부의 지성파 시인들인 [뉴욕 시인(The New York Poets)] 그룹과 더불어 미국시단을 대표하고 있는 양대 산맥이다.샌프란시스코 시인들의 특성은 자유분방하고, 저항적이며, 생태주의적이고 비트세대(
잭 로고우는 자신의 자서전적 경험에 대해 자주 글을 쓴다. 그의 글은 환경, 사회정의, 그리고 현대 세계에서 정신적인 것의 역할에 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의 8번째 시집인 『라디오와 이야기하기: 재즈와 팝 음악에 영감을 얻은 시들』이 2015년 캐티웜푸스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의 다른 시집으로는 2012년에 출간된 『나의 어머니와 천장 댄서들』, 2008년에 출판된 『무한 이전의 숫자』등이 있다. 그의 시는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한국어, 그리고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캘리포니아대학교 출판사에서 발간된 『시의 얼굴』이라는 미국시 선집을 편집하기도 했다.

잭 로고우는 국제적인 작가들에 관한 연작 희곡을 써서 그들의 삶을 극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가장 최근의 작품 『무삭제 콜레트』는 프랑스 작가 콜레트에 관한 것으로, 워싱턴 DC의 케네디 센터 밀레니엄 극장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고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의 〈더 마시〉에서 6개월 동안 공연되었다. 이 연작 희곡은 요사노 아키코, 나짐 히크메트, 그리고 레오폴드 세다르 센고르와 같은 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작가이자 편집자인 잭 로고우는 20권의 책과 희곡을 번역했으며 현재 알래스카대학교 앵커리지 캠퍼스에서 문예창작석사(MFA)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카마마란 문예지󰡕의 기고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블로그 『작가들을 위한 조언』에 작가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로 200건 이상의 글을 올려놓고 있다.

아시아 작가

아유 우타미Ayu Utami(인도네시아)
주요경력
소설가, 저널리스트
자카르타 예술위원회 소설상 수상 등 다수 수상

아유 우타미는 수하르토 퇴진 이후의 신세대 인도네시아 예술가들 가운데 돋보이는 작가다. 우타미는 1994년 수하르토 정권이 세 개의 잡지(Tempo, Editor, Detik)를 판금한 후에는 신세대 언론인들과 함께 독립 저널리스트 연맹을 결성하고 민주화 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지하 저널리스트 활동을 했다.

1968년 11월 21일, 보고르에서 태어났다. 주로 장편과 단편을 포괄하는 소설을 쓴다. 대표작으로는 1998년작인 《사만(Saman)》이 있는데, 이는 2001년 네덜란드어로 가장 먼저 번역된 이래 2005년 영어로 번역되었고, 이 외에도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 체코어 등으로도 번역되었으며 2009년 한국어(전태현 역, 청년사)로 번역되었다.

아유 우타미는 수하르토 퇴진 이후의 신세대 인도네시아 예술가들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다. 우타미는 자와의 보고르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성장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인도네시아 대학교에 진학하여 러시아어학과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였다. 우타미는 대학교 재학 중에 여러 신문에 르포와 에세이를 투고함으로써 작가 경력을 시작하였다. 또 잠깐 모델로도 활동하여 1990년 미인 대회 '와자 페미나(Wajah Femina)'의 최종심까지 진출하였으나, 화장하는 것을 싫어하여 모델 경력을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우타미는 계속해서 다양한 신문사(Humor, Matra, Forum Keadilan, D&R 등)에 글을 싣는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아 나갔다. 그러나 1994년 수하르토 정권이 세 개의 잡지(Tempo, Editor, Detik)를 판금한 후에는 신세대 언론인들과 함께 독립 저널리스트 연맹(인도네시아어: Aliansi Jurnalis Independen)을 결성하여 이 조치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하였다. 그 후 우타미는 자카르타 동부 외곽의 작은 지하 극장 '우탄 카유(Utan Kayu)'을 비밀 근거지로 삼고, 구나완 모하맛(Goenawan Mohamad)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우탄 카유 공동체를 결성하여 지하에서 저널리스트 활동을 계속하였다. 수하르토 정권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흑서를 익명으로 출판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998년 수하르토 퇴진 몇 주 전에 발표한 우타미의 첫 소설 《사만》은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이 소설은 같은 해 자카르타 예술위원회 소설 공모전에서 1등상을 받아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인도네시아 예술가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전통적인 문체와 가치관을 타파하고 여성의 성적 자유, 종족 간의 차별, 종교를 둘러싼 인간적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는 많은 평자들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고, 인도네시아 문학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후에도 우타미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계속하여 2008년작 장편 소설 《빌랑안 푸(Bilangan Fu)》로 적도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창간한 문예지인 《칼람(Kalam)》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담딘수렌 우리앙카이Damdinsuren Uriankhai(몽골)
주요경력
시인
몽골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몽골작가협회 수상 등 다수 수상

담딘수렌 우리앙카이는‘오랑캐’라는 부족 명을 자신의 필명으로 삼고 있다. 불교에 정통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가르침에도 밝은 인문학자로 평가를 받는다. 전통과 현대를 잃지 않고, 장년의 지혜와 젊음의 문화를 함께 누리는 ‘열린 지식인상(像)’을 가지고 있다.

담딩수렝 우리앙카이는 1940년 몽골에서 태어났다. 1959년에서 1964년까지 러시아 모스크바 주정부 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가공무원을 지냈다. 1977년에 러시아 유학을 다시 가서 고리키문학연구소에서 3년간 고등교육 과정을 밟고, 시, 소설, 희곡, 에세이 등 다양한 방면의 글쓰기를 해왔다. 몽골에서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가음유시인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업적과 평가에 무심한 시인의 모습을 지키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앙카이는 한때 몽골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직을 맡기도 했던 세련된 도시인이면서도 늘 남루한 유목민의 전통의상을 입고 다닌다. 우리앙카이라는 이름도 13세기 유라시아 고원에서 두각을 드러낸 부족의 이름인바, 그는 중원에서 소위 ‘오랑캐’라 부르는 부족 명을 자신의 필명으로 삼고 있다. 사상적으로도 불교에 정통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가르침에도 편견을 갖지 않고 천착하여 동서고금의 철학에 밝은 인문학자로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몽골의 시인들은 그에게서 늘 전통과 현대를 잃지 않고, 장년의 지혜와 젊음의 문화를 함께 누리는 ‘열린 지식인상(像)’을 느낀다 한다. 그래서 그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시인은 아니지만 후학들에게 존경받고 몽골의 평론가들에게 압도적 지지를 받는 ‘몽골 대표 시인’으로 꼽힌다.

몽골의 문학적 환경은 소비에트 해체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환멸과 함께 시작된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사로잡히며, 거의 모든 시인이 유목민적 서정성에 기초한 전통적 시가 경향과 도시생활 중심의 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과도한 경사에 참여하여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로 인해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난 많은 시인들이 “다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다”는 평을 받을 때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여 온 시인이 우리앙카이였다.

그는 오늘날, 유목문학만이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거나 서양의 모더니즘 조류를 무조건 따라가지 않고 오직 현대 몽골의 영혼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듣는 한편, 연륜을 더해갈수록 사람은 새로워야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젊은 시인들과의 교류를 계속하면서, 후학들로부터 유목민 감수성에 현대적 사유를 얹은 시인, 몽골의 시에 직관과 통찰의 영토를 개척한 시인이라 하여 존경을 받는다.

둬둬Duo Duo(중국)
주요경력
시인, 대학교수
노이슈타트 국제문학상 수상

1970년대 초부터 오늘날까지 둬둬의 시는 깊이 있는 고독의 탐색으로 수많은 동시대 청년 시인들에게 영향과 자극을 주어 왔다. 고통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생명에 대한 내적 성찰로 인류 생존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으며, 언어와 문화 전체에 대한 광적인 도전으로 중국 당대 시가의 내용과 표현력을 크게 제고시켰다.

둬둬는 당대當代 중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 본명은 리스정粟世征이다. 1951년에 베이징에서 출생했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9년에 바이양뎬白洋澱으로 하방되어 지식청년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농민일보》에 배정되어 근무했다. 1972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82년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 베이징대학 문화절시가상을 수상했고 2000년에는 제1회 안가오安高시가상을 수상했다. 1989년에 중국을 떠나 네덜란드에서 30년 가까이 생활하면서 영국 런던대학교와 캐나다 뉴크대학, 네덜란드 라이든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여러 차례 세계 국제 시축제에 참가했으며 영국과 미국,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등 10여 개 국가에 초빙되어 대규모 강연과 낭송회를 진행했다. 2004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하이난海南대학 인문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2010년에 미국 뉴스타트국제문학상the Neustadt International Prize for Literature을 수상했으며 중국인민대학에 주교住校 시인으로 초빙되었다.

시집으로 『행례行禮:시38수』(리쟝漓江출판사,1989년), 『이정里程:둬둬시선 1973-1988』(1989년), 『암스테르담의 하류河流』(베이웨北岳 문예출판사,2000년), 『둬둬시선诗选』(화청花城출판사,2005년), 『둬둬시선』(인민문학출판사,2012년),『둬둬 40년시선』(쟝쑤江苏문예출판사,2013년) 등이 있고 단편소설집 『차를 타다(搭车)』(바이화百花문예출판사,2004년)를 출간한 바 있다. 영국과 캐나다, 타이완,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 여러 국가에서 번역 시집 및 수필집이 출간되었다.

둬둬는 1988년 몽롱시 시인들이 발간하던 지하간행물 『오늘今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늘’ 시가상을 수상하면서 『이정』이란 제하의 유인물 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당시 『오늘』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오늘날까지 둬둬의 시는 깊이 있는 고독의 탐색으로 수많은 동시대 청년 시인들에게 영향과 자극을 주어 왔고, 고통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개체의 생명에 대한 내적 성찰로 인류 생존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으며, 언어와 문화 전체에 대한 광적인 도전으로 중국 당대 시가의 내용과 표현력을 크게 제고시켰다”라고 수상자 선정 이유를 밝힌 바 있다.

1989년 6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시가 낭송회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을 떠난 그는 정치적 이유로 단 한 번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계 각지를 떠돌며 시가 창작 활동에 전념해 왔다. 그 중간 결산이 바로 2000년에 출간된 시집 『암스테르담의 하류』라 할 수 있다.

2004년에 둬둬가 조국을 찾은 것은 중국 시단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의 시가 집중적으로 발표된 2004년 『서성書城』잡지 제8기의 「둬둬소집多多小辑」은 2000년대 이후의 그의 창작면모를 잘 모여주고 있다. 이미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시인은 여전히 왕성한 창작의 에너지와 회로 같은 열정과 솜씨를 과시하고 있었다. 편집자 링웨凌越는 나이 50이 넘은 이 시인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 것은 대단히 희귀한 일로서 중국의 모든 시인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사가와 아키Sagawa Aki(일본)
주요경력
시인
일본시인클럽상 수상 등 다수 수상

일본에서 사회파 문인이란 양심적이며 역사를 직시하는 문인들을 지칭한다. 사가와 아키 시인은 초기 시부터 일관되게 민중적이며 사회비판적인 시를 써왔다. 일본제국주의의 징병, 징용, 종군위안부 피해자, 독립운동가, 차별당하는 재일동포 등을 시로 형상화하고, 가난과 전쟁, 재해로 신음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 피해자들의 고통을 그려냈다.

1954년 도쿄(東京) 출생. 요코하마(横浜)국립대학 교육학부 졸업.

1974년 대학시절에 한국의 김지하 시인의 구명운동과 1980년 초 광주항쟁 이후 한일연대 시민운동 등에 동참하면서 한국의 민중・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인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1985년 월간 시문학지 《시카쿠(詩學)》로 데뷔했고, 1991년 첫 시집 『죽은 자를 다시 잉태하는 꿈』을 출간하여, 제25회 오구마 히데오(小熊秀雄)상과 제23회 요코하마시인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93년 시집 『영혼의 다이버』를 출간했고, 2004년 시집 『답신』을 출간하여 제4회 시토소조(詩と創造)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 시집 『꽃누르미』로 제46회 일본시인클럽상을 수상했다. 2017년 시집 『왁자지껄 떠들썩한 종(種)』을 출간했다.

1997년부터 2012년까지 월간 시문학지 《시토시소(詩と思想)》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현재는 편집만 참여). 그동안 이 시문학지에 한국시인 특집과 재일교포시인 특집을 다수 기획했다.

또한 일본사회문학회 심포지엄 「한국의 새로운 시」, 조사이(城西)국제대학 「한국 여성시에 대해」, 도쿄(東京)대학 시바타 도모유키(柴田元幸)(영문학 교수)의 다문화교실 「한국 현대시에 대해」등 일본에서 한국시에 관해 다양하게 강연・강의하고 있다.

사가와의 작품에는 ‘영혼’이 강하게 의식되어 있는데 영혼이란 인간의 존엄이며, 신비한 마음속 의지의 에너지이다. 사가와의 사회비판의 시는 사회의 이름으로 개인의 마음을 짓밟고 무시하는 것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기성의 이념도 정치 당파도 아닌, 개인의 직감과 인간성에 비추인 분노이며 불합리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추종이다.

일본에서 사회파 문인이란 양심적이며 역사를 직시하는 문인들을 지칭한다. 사가와 아키 시인은 초기 시부터 일관되게 민중적이며 사회비판적인 시를 써왔다. 일본제국주의의 징병, 징용, 종군위안부 피해자, 독립운동가, 차별당하는 재일동포 등을 시로 형상화하고, 가난과 전쟁, 재해로 신음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 피해자들의 고통을 그려냈다. 특히 조선인 피해자에 대한 시편들이 많다. 시편마다 일본 역사와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깊은 고찰과 인간을 응시하는 통찰이 투영되어 있다. 시어는 지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서사적이며 무게감이 있다. 사색적이고 휴머니즘적인 표현도 매력적이다.

일본에서 사회파 문인이란 양심적이며 역사를 직시하는 문인들을 지칭한다. 사가와 아키 시인은 초기 시부터 일관되게 민중적이며 사회비판적인 시를 써왔다. 일본제국주의의 징병, 징용, 종군위안부 피해자, 독립운동가, 차별당하는 재일동포 등을 시로 형상화하고, 가난과 전쟁, 재해로 신음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 피해자들의 고통을 그려냈다. 특히 조선인 피해자에 대한 시편들이 많다. 시편마다 일본 역사와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깊은 고찰과 인간을 응시하는 통찰이 투영되어 있다. 시어는 지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서사적이며 무게감이 있다. 사색적이고 휴머니즘적인 표현도 매력적이다.

사가와 시인의 제1시집 『죽은 자를 다시 잉태하는 꿈』은 역사상 죽은 자들을 다시 문학적으로 부활시킨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집으로 사가와 시인은 제25회 오구마 히데오(小熊秀雄)상과 제23회 요코하마시인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샴즈 랑루디Shams Langeroodi(이란)
주요경력
시인, 극작가, 대학교수
이란 Ahang-e Digar 출판사 편집자

샴즈 랑루디는 시인, 문학사가, 대학교수, 편집자, 배우 등의 다양한 직업을 섭렵했다. 1975년 페르시아어 문학을 가르치다 정치적인 이유로 해고되었고 1982년 체포되어 1년간 영어생활을 하기도 했다. 감옥 생활의 경험은 그의 사고와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모든 힘을 문학에 쏟아 붓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거장
샴스 랑루디는 1950년 이란 길란(주도: 라쉬트)주의 랑그루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자아파르 샴스 랑루디는 25년 동안 랑갸루드 시의 금요 예배를 집전한 이맘이었다.

랑갸루드에서 샴스의 유년시절은 부친의 영성적 메시지에 귀 기울이면서도, 라쉬트의 교의에 얽매이지 않는 당시 문화적 분위기와 함께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바로 이 시기에 보들레르의 시와 삶에 관해 탐독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1974년 <라쉬트 고등상업학교> 경제학과에서 학사를 취득했으며 동시에 수학과에서 디플로마 코스를 이수했다.

1975년 그는 테헤란으로 이주하여 콰레즘여자고등학교에서 페르시아어 문학을 가르쳤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정해져있는 틀 안에서만 가르쳐야만 했고, 문학 교육은 구시대적인 주제들만을 다루고 있었다. 샴즈는 일상 속에서 사회적 삶을 반영하는 문학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현대시들을 읽게 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학교 당국은 이러한 문학 교육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를 해직시켰다. 그 후 그는 최초의 시집, 『목마름의 행위』를 1976년에 발간한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그는 일상생활 속의 사회를 반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체주의적 시각이 주를 이루었던 기존 이란 시의 미학적 관점과 결별하게 된다. 그 후 샴즈는 생활과 초현실주의가 조합된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또 그의 관심사는 대중이었다. 사람들이 시를 읽는 것에 관심을 갖고, 시들로부터 감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시들을 창작했다. 1979년 파르저네 더바리와 결혼했으며, 그 해 고향을 떠나 2년 동안 테헤란에서 창작에 전념했다.

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운동가’가 된 적은 없지만 항상 기존의 현상에 대해 항의를 해왔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거리에서 체포 되었을 때 동생도 거리에서 체포되었고, 가택 수색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샴즈가 쓴 노트필기와 시들이 발각되어 그도 체포되었으며 동생과 함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주변사람들의 끈질긴 중재로 1년 후에 석방되었지만 감옥 생활의 경험은 그의 사고와 세계관에 깊은영향을 끼쳤고 문학에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샴스의 명성은 『재와 숙녀』와 『보이지 않는 잔치』의 시집이 발간된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틈새로 웃고 있는 가시다(송시)』의 발간 이후 큰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10년간을 조용하게 시를 지으면서 보냈다. 2000년에 시모음집 『목각 밤꾀꼬리를 위한 음표들』을 출판시장에 내놓았으며 침잠의 시기를 보상이라도 하듯 2000년대에 『53수의 사랑의 노래』를 비롯해 8권의 시집을 발간했고, 『티르 달의 23편의 애가』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그는 2010년 하미드레저 알리갈리연 감독의 ‘13번 플라멩고’ 영화에서 한 시인의 역할로 등장했다. 3년 후 레저 키여니연과 함께 타라 오타디 감독의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2014년에는 바흐터쉬 사너이허 감독의 영화에서 자신의 배역에 전념하였고 제9회 이란 영화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언어와 의미면에서 단순함과 유창함은 구어체에 가깝다. 그는 『목각 밤꾀꼬리을 위한 음표들』에서 이상주의와 이데올로기적 관점과 작별하고 새로운 세계의 성립에 매진하고 있다.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 풍자, 일상적인 삶을 노래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표현들은 그의 시의 주된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는 2016년부터 테헤란의 파르스 대학에서 <이란과 세계고전 문학에 대한 이해>라는 과목으로 강의하고 있다.

국내작가

현기영
주요경력
소설가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궤뚫었을 뿐이었다.

1941년 제주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20여 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 제5회 만해문학상, 제2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1999년 『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역임했다.주요 저서로는 소설집 『순이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타는 섬』『누란』, 산문집 『젊은 대지를 위하여』, 『바다와 술잔』 등이 있다. 우리 현대사의 이면을 다룬 깊이 있는 작품을 써왔고, 중후하고 개성 있는 문체로 오늘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다.

이상국
주요경력
시인
1976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소나무 숲에는 누군가 있다/ 저물어 불 켜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저렇게 먼 데만 바라보겠는가

1946년 강원 양양에서 출생. 1976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동해별곡』, 『내일로 가는 소』 ,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국수가 먹고 싶다』, 『뿔을 적시며』 등이 있다.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불교문예작품상, 박재삼 문학상 수상.

이시영
주요경력
시인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사랑한다는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 전해드리기 위해/ 이 강에 섰건만/ 바람 이리 불고 강물 저리 붉어/ 못 건너가겠네 못 가겠네

1949년 전남 구례에서 출생하여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학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월간문학〉 제3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강의하였으며 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를 역임,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시집으로 『만월』 『바람 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맺힌 노래』 『무늬』 『사이』 『조용한 푸른 하늘』 『은빛 호각』 『바다 호수』 『아르갈의 향기』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호야네 말』이 있고, 시선집으로 『긴 노래, 짧은 시』가 있다. 만해문학상, 백석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지훈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박재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있다.

최원식
주요경력
문학평론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민주화에 반비례해 한국문학은 주변화되고 있다. 달라진 세상에서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새롭게 조정해냄으로써 한국문학을 다시 세워야 할 것”-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취임사

문학평론가 최원식崔元植은 1949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이해조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부문에 입선해 평론가로 등단했다. 계명대 ·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창작과비평사 편집주간, 민족문학사연구소 공동대표,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서남포럼 운영위원장,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1년 「문학의 귀환」으로 제9회 대산문학상 평론 부문과 제6회 시와시학상 평론상을, 2010년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로 제2회 임화문학예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세교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민족문학의 논리』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문학』 등이 있고, 일역서로 『한국의 민족문학론韓國の民族文學論』과 『동아시아문학공간의 창조東アジア文學空間の創造』, 중역본으로 『문학의 귀환文學的回歸』 등이 있다. 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이동순
주요경력
시인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남북 물줄기들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염이 생선가시같이 억센 뱃사공 영감의/ 구성진 정선아라리를 들으며/ 우리는 물길 따라 무수히 흘러간/ 그의 고단한 생애를 되질해내고 있었다./ -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쪽이 나지만/ - 삼팔선 깨어지면 한덩어리로 뭉치지요/ 한순간 노랫소리가 아주 고요히/ 강나루 쪽으로 반짝이며 떠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한국현대문학사를 공부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 당선(1973),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시와 구체적 싸움의 진정성-김남주 시에 대하여」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철조망 조국』,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꿈에 오신 그대』, 『봄의 설법』, 『가시연꽃』,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마음의 사막』, 『미스 사이공』, 『발견의 기쁨』, 『묵호』, 『멍게 먹는 법,』, 『마을 올레』 등 16권 발간. 2003년 민족서사시 『홍범도』(5부작 10권) 발간.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우리 시의 얼굴 찾기』,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발간. 편저 『백석시전집』, 『권환시전집』, 『조명암시전집』, 『이찬시전집』, 『조벽암시전집』, 『박세영시전집』을 포함하여 각종 저서 55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 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허영선
주요경력
시인
제주 4·3연구소 이사·제주대 강사

해녀들은 생의 마지막에/ 둥근 파도 소리를 듣는다/ 묵은 생의 지붕을 달래주던 소리/ 새로운 생을 함께하던 그 소리/ 파도와 함께 해녀들은 바다새처럼/ 파도 소리를 내며 생을 다한다.

1957년 제주도에서 출생했다. 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제주 4·3평화재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제주 4·3연구소 이사·제주대 강사로 있다.

제주도에서 출생. 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제주 4·3평화재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제주 4·3연구소 소장, 제주대 강사로 있다. 제주대 대학원 한국학협동과정 석사,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석사논문 「제주 4·3시기 아동학살 연구」가 있으며, 저서로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뿌리의 노래』, 『해녀들』, 에세이집으로 『섬, 기억의 바람』, 『탐라에 매혹된 세계인의 오디세이』, 역사서로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4·3구술집으로 『빌레못굴, 그 캄캄한 어둠속에서』, 『그늘속의 4·3』 (공저), 그림책 『바람을 품은 섬 제주도』, 『워낭소리』 , 『애기 해녀 옥랑이 미역 따러 독도 가요!』 등을 펴냈다.

정철훈
주요경력
시인
러시아국가자격최고위원회 박사학위

누군가 초례를 마치고 신행 가던 길이/ 다시 누군가의 상여로 돌아오듯/ 나는 떠돌았던 지난 생이 부끄러웠다/ 무엇이 우리를 그 밤에 살게 하였을까어허, 눈이 내리는데/ 눈이 내가 걸어온 길을 지우는데/ 내가 무엇을 더 서러워할 것인가/ 텅 빈 점방에서 주인장도, 주전자도 깜박 잠이 들고/ 물이 혼자 끓고 있었다.

1959년 전남 광주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다. 국민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러시아국가자격최고위원회에서 <10월 혁명 시기 극동 러시아에서의 한민족 해방 운동(1917∼1919)>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백야」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살고 있는 아침』(2000),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2002), 『개 같은 신념』(2004),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2010),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2006), 『카인의 정원』(2008), 『소설 김알렉산드라』(2009), 러시아 체류기 『소련은 살아 있다』(1995), 전기 『김알렉산드라 평전』(1996), 러시아 사회평론집 『옐찐과 21세기 러시아』(1997), 문학평론집 『뒤집어져야 문학이다』(2009) 등이 있다.

안도현
주요경력
시인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으며,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같은해 전북 이리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첫 번째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출간하였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지 5년만에 복직되었으며, 1996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고, 1997년 전업작가가 되었다. 2004년 이후에는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대환
주요경력
소설가
계간문예지 『아시아』 발행인

이념이 인간의 조건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 이념을 창조하는 것이니/ 변화한 현실을 인정하고 통찰하지 않으면/ 시대정신의 담론을 생산하는/ 근거라고 믿어온 과거의 사고와 신념에 대해/ 냉철히 자성할 수 없게 되고/ 이것은 과거의 사고와 신념을/ 현재의 오류와 아집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영일만 갯마을(현 포항제철소)에서 나고 자랐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인 1980년(22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가 주관한 장편소설 현상 공모에 당선되고, 1989년 『현대문학』 지령 400호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본격화했다.

소설집 『조그만 깃발 하나』와 『생선 창자 속으로 들어간 詩』 이후 지난 십여 년 동안 단편소설을 쓰지 않은 가운데 『겨울의 집』, 『슬로우 불릿』, 『붉은 고래』(전3권) 등 전작 장편소설과 현재 한국 경제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평전 『박태준』을 발표했다. 2008년에 중편 소설집 『이 즐거운 세상』과 장편소설 『큰돈과 콘돔』을 내놓는다. 현재 계간문예지 『아시아』 발행인을 맡고 있다.

안상학
주요경력
시인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그 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196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11月의 新川」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가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신현림
주요경력
시인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아주대학교에서 ‘텍스트와 이미지, 시 창작’을 강의

울 수도 없이 눈물도 잊어갔다/ 팔은 발을 잊었고, 다리는 머리를 잊었다/ 무엇이 이토록 잊게 만드는 걸까/ 상처일까 외로움일까 내일 밥값일까/ 밥값이 없어 굶는 이들은 지구 밖으로 내쫓겼다/ 무엇이 소중한지 모른 채 자꾸 잊어갔다

시인·사진가. 디자인과 국문학을 전공했고, 디자인대학원(파인아트 전공)을 졸업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아주대학교에서 ‘텍스트와 이미지, 시 창작’을 강의했다. 신선하고 파격적인 상상력과 독특하고 매혹적인 시와 사진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를 펴냈다. 스테디셀러인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 영상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힐링에세이 『만나라, 사랑할 시간이 없다』, 『서른, 나에게로 돌아간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그리고 세계시 모음집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1, 2권, 『시가 너처럼 좋아졌어』와 태교시집은 장기 베스트셀러로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역서로는 『예술가들에게 슬쩍한 크리에이티브 킷 59』, 『Love That Dog』 등이 있다.

정지아
주요경력
소설가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먹고 작고 싸는 몸의 습관을 모두 잊은 어머니는/ 기다림이라는, 마음의 습관마저 모두 버린 어느날,/ 비로소 이승의 문턱을 넘어/ 한 생 빌려입은 고단한 육신을/ 편히 누일 수 있을 터였다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빨치산의 딸』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 『행복』(2004년)과 『봄빛』(2006년)이 있다. 이효석문학상(2006년), 한무숙문학상(2008년), 오늘의 소설상(2009년)을 수상했다.05) 등이 있다. 청소년소설 『숙자 언니』 『어둠의 숲에 떨어진 일곱 번째 눈물』『노구치 이야기』 등이 있다.

이대흠
주요경력
시인
[현대시 동인상] [애지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작가세계 소설부문 신인상] 등을 수상

놀랍구나, 너는/ 너만으로도 충만이면서/ 사랑으로 넘치고 있으니//놀랍고 고맙다, 나의 사랑아/ 절대의 아름다움이여/ 내 우주의 중심이여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서 서울예술대학과 조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1994년 [창작과비평]에 [제암산을 본다]라는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물속의 불] 등이 있고 산문집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 장편소설 [청앵] 등이 있습니다. 어린이 책으로는 시힘 동인과 같이 쓴 [뒤뚱뒤뚱]이 있습니다. [현대시 동인상] [애지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작가세계 소설부문 신인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입니다.

김해자
주요경력
시인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큰 배가 항구에 접안하듯/ 큰 사랑은 죽을 만큼 느리게 온다/ 나를 이끌어다오 작은 몸이여/ 온몸의 힘 다 내려놓고/ 예인선 따라가는 거대한 배처럼 큰 사랑은 그리 순하고 조심스럽게 온다/ 죽음에 가까운 속도로 온다

저자 김해자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조립공, 시다, 미싱사, 학습지 배달, 학원 강사 등을 전전하며 노동자들과 시를 쓰다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산문집 『민중열전』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등이 있으며, 전태일문학상과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손세실리아
주요경력
시인
2001년 '사람의 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

허공에 몸 날려 해체된 19층 여자/ 네 살배기 아들 만나러/ 아파트 외벽 기어오르는 중이다/ 다 왔나 싶은데/ 이제 겨우 1.5층/ 손바닥 짚었다 뗀 자리마다/ 인줏빛 선명하다/ -붉은 담쟁이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사람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기차를 놓치다』 와 『꿈결에 시를 베다』 가 있으며 산문집 『그대라는 문장』이 있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곰국 끓이던 날」 수록.

송경동
주요경력
시인
2001년『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1967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나 2001년『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함.

구로노동자문학회와 전국노동자문학연대 등과 함께 활동하며 시와 산문으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음.

박소란
주요경력
시인
제1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제33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 채 실려 간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 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 보낸 당신이 오래 오래 아프면 좋겠다

1981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이 있다. 제1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제33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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