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나목(裸木)」으로 등단한 박완서 작가가 작고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이후 약 30년의 시차를 두고 2000년대 등단한 주요 작가들이, ‘산울림’ 의 음악을 재해석하여 노래하는 ‘잔나비’ 처럼, 저마다의 “꿈과 책과 힘과 벽”의 서사를 변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작가들을 역순으로 추적하여 박완서론(論)으로 마무리 짓는 본 프로그램은 박완서의 글쓰기가 여성 서사의 한 원류로 한정되지 않으며, 2000년대 이후 성장, 이탈, 확장, 혹은 절멸(絶滅)하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예견하였음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그룹 사운드 ‘잔나비’ 2집 《전설》에 수록된 〈꿈과 책과 힘과 벽〉에서 인용.
‘잔나비’는 2014년 데뷔한 젊은 그룹 사운드로, 197,80년대를 풍미했던 ‘산울림’ 처럼 서정적이면서도 복고풍 사운드, 호소력 짙은 음색이 특징. 뮤직 비디오에 산울림의 LP판을 삽입하거나 산울림 노래 커버도 여러 곡 하였으며, 실제로 멤버 전원이 산울림, 비틀스의 열렬한 팬이라고 밝힌 바 있음.

다른 장르에 비해 소설 쓰기의 얄궂은 면을 꼽아 보자면 허구성과 개연성을 동시에 구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의 소설들은 죄다 지어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시 있을 법하거나 믿음직한 이야기로 번거롭게 포장해야 한다. 소설에서의 개연성이란 허구성에 대립하거나, 단순히 현실을 닮은 이야기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인과성 내지는 일관성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심지어 소설의 허구적인 사건이 현실의 경험 보다 개연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비약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투성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독자인 우리가 『변신』을 믿게 되는 것은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가 세상 어딘가에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라, 벌레를 대하는 인물들의 일관되고 인과적인 행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장면을 사실 그대로 소설에 옮겨올 때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개연성이나 인과성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것일까. 더구나 그게 사실인지 허구인지 독자인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걸까.

소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사람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할까요. 소설은 생각보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까다로운 장르입니다. 인물, 사건, 배경을 구성해야 하고, 맥락에 따른 서사를 촘촘히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화자를 내세웁니다. 때문에 작가가 이야기의 전면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인물이 있고, 화자가 있으니까요. 작가는 그것을 원합니다.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통해 이야기가 전달되기를 바라죠.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작가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인 셈입니다.

그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그리고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이 강좌에서는 제가 지금까지 소설을 쓰면서 느꼈던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너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위로를 가져오는지, 나아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소설의 영원한 주제는 인간이다. 역사적으로 이야기는 형식과 방법을 바꾸어가며 줄곧 인간을 추구하고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가장 인간적으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소설일 것이다. 작가는 인간에서 인간을 발견해 소설로 기입한다. 독자는 소설을 통해 새로운 인간을 발견한다. 이렇게 소설의 역사는 독자에서 작가로 다시 작가에서 독자로 이어진다.

발명하다(invent)라는 단어는 라틴어 “인베리네 invrnire”에서 나왔다. 그것은 “우연히 떠오르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발명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고안하다” “설계하다” “만들어내다”로 설명될 수 있는 창작의 기본 원리는 사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다”라는 뜻에 가깝다.

따라서 소설의 세계는 읽는 자가 쓰는 자가 되고 쓰는 자는 다시 읽는 자가 된다. 소설을 통해 무엇인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인간을 알려주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인간에 대해 증언하게 한다.
소설을 읽고 쓰는 삶을 사는 동안 내가 발견한 것들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행위에 대해 내일 또다시 꿀 수 있는 꿈을 꾸는 행위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꿈은 깨면 다시는 같은 꿈을 꿀 수 없지만 소설은 다시 꿀 수 있는 꿈이라고요. 저는 이 말에 무척 동의합니다. 저에게 소설은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작가님들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깨지 않기 바라는)꿈이 있을 것입니다.

저의 소설 속에서 중요한 모티프 중 하나는 ‘노크’ 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어느 정도는 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나라는 개인과 세계 사이에 놓여진 벽도 있습니다. 저는 그 벽을 허물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벽을 두드릴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벽을 두드린 것,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노크 소리를 듣고 누군가 거기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행위 일지도 모릅니다.

벽을 두드리고, 다른 사람의 노크 소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낼 용기, 혹은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충분히 숨길 수 있는 용기, 그러니까 힘이 필요합니다. 누구보다 솔직하고 동시에 누구보다 철저하게 솔직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저의 소설은 그러한 힘을 내는 인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디어 랄프로렌>의 종수는 있는 힘껏 다른 사람의 노크 소리를 무시하다가 결국은 거기에 응답하게 됩니다. <작은 동네>의 주인공은 자신이 언제나 다른 사람의 노크 소리에 응답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거짓된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의 책을 읽는 분들이 그런 힘을 조금이나마 얻기를 바랍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께서 작고하신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불혹의 나이, 40세(1970)에 늦깎이 작가로 등단하여 돌아가시는 해까지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은 열정과 의지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작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의지하고 따르고자 하는 작가 가운데 한 분이 박완서 작가입니다.
이번 강의는 임현, 강화길, 정용준, 손보미 등 젊은 작가의 작품에 담겨있는 꿈과 힘이 박완서 작품의 꿈과 힘에 어떤 방식으로 닿아 있으며 예술가의 상상력과 의지를 추동하거나 가로막는 벽을 뛰어넘어 한 권의 책, 혹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탄생하여 많은 독자의 공감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그 의미와 과정을 짚어보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독자 여러분의 창작 혹은 독서 행위를 통한 아름다운 꿈과 힘이 찬란하게 전개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