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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SIA CULTURE CENTER

ACC 텔레프레젠스 혼합현실 프로젝트 < 검은 강, 숨은 숲 – 6 Senses >

자연과 생명 그리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체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미디어와 기술이 융합된 문화예술 콘텐츠 개발 및 제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시아문화원과 Studio Art55(작가 홍순철)가 협업한 전시

ACC 텔레프레젠스 혼합현실 프로젝트   < 검은 강, 숨은 숲 – 6 Senses >
  • 기간2019.12.10(화) - 2020.1.27(월)
  • 시간(화-일) 10:00 - 18:00
    (수,토) 10:00 - 19:00
  • 장소문화창조원 복합1관
  • 대상모든 연령
  • 가격 무료
  • 예매자유 관람
  • 문의1899-5566
갤러리

소개
ACC 텔레프레젠스 혼합현실 프로젝트
< 검은 강, 숨은 숲 – 6Senses >
ACC 텔레프레젠스 혼합현실 프로젝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미디어와 기술이 융합된 문화예술 콘텐츠 개발 및 제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시아문화원과 Studio Art55(작가 홍순철)가 협업한 < 검은 강, 숨은 숲 – 6 Senses > 전시를 개최합니다. 이 전시는 초연결 정보사회를 살아가는 관람객들이 자연과 생명 그리고 공간과 시간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예술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습니다. 나주에 위치한 ‘숨은 숲’ 내 7개의 늪지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시장으로 생방송 송출하고, 전시 현장을 ‘숨은숲’으로 재송출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복합실재시공간을 경험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숨은 숲’에 서식하는 생명체의 종 다양성과 생태계의가치를 인식하고,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역할과 책임감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그 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숨은 숲의 시공간을 옮기다.
여섯 감각을 찾아 지금-여기를 새롭게 발견하다.”
이 작품은 전라남도 나주의 자그마한 ‘숨은 숲’의 시공간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시장의 시공간으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시공간을 옮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이 질문에 홍순철 작가와 전시는 ‘6 Senses!’를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자기 자신만의 여섯 감각을 찾는 이야기가 이 작업의 내용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있는 ‘지금, 여기’를 새롭게 발견하는 데서 6 Senses 찾기는 출발합니다. 모든 공간의 사물들은 시간 속에서 계속 변화합니다. ‘숨은 숲’의 시공간 속 뭇 생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본 자연과 생명의 모습들은 찰나의 시공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찰나에 체험할 뿐입니다.

오늘날 미디어는 급속히 발전하면서 실제와 가상의 혼재된 시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현실인가?’ 이제 이런 물음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시공간의 실체에 대한 성찰이 새롭게 요청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감각적이며 감성적인 판단에 의해 실체로 여기는 현상들의 시공간 안에는 보이고 들리는 것보다 많은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여섯 감각-6 Senses를 찾아 현재의 ‘지금, 여기’를 새롭게 발견하는 출발선에 함께 서 있습니다.
작가노트
시공간을 옮기다.
시공간을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물고 늘어져야 할 화두처럼 내게 각인되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경험은 어떤 사물과 상황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이다. 나는 우선 눈에 보이는 대상 그리고 그 시공간 뒤꼍에 내재된 시스템에 주목하고자 한다. 나의 작업은 지금 내가 바라보는 공간의 표면이 아니라 그 심연 속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을 관찰하며 해석하고 재구조화하여 전시장의 시공간으로 옮기는 일이다.
감각의 상실 시대, 나는 어디에 있는가?
4년 전 나주의 ‘숨은 숲’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강렬했던 그 체험을 말해야 한다. 모든 것을 새롭게 듣고, 보고, 냄새 맡고, 피부로 감가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TV 미디어에서 프로듀서로 일해 온 나에게 이런 경험은 초연결 사회 시스템 속에서 내 감각이 얼마나 무뎌지고 각질화 되었는지를 자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외부와 연결된 ‘감각의 확장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진실로 ‘감각상실의 시대’에 사는 것이다.
다양한 시공간이 혼재된 현실이 지금 실재하는 세상이다. 혼재된 시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온전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시공간과 조우하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도록 길을 당신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
작가소개
홍순철 HONG, SOON-CHYUL
  • 195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졸업
  • 한국 서울에서 살면서 작품활동
1980년대부터 미술작가로 활동하면서 3번의 개인전과 수십차례의 단체단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영상과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창작활동을 하고있다. 더불어 MBC, SBS에서 20여 년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듀서로 일을 했다.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자리를 옮겨 TV 제작연출과 다큐멘터리연출을 가르쳤으며, SBS 편성본부장으로 재직하였다. 방송.영화 다큐멘터리 감독과 미디어 설치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기타
텔레프레젠스 홍순철 전시 < 검은 강. 숨은 숲 – 6 Sense >
잃어버린 감각을 찾아서
글. 심혜련 (전북대학교 교수)
1. 2019년, < 멜랑콜리아 >
알브레히트 뒤러(Abrecht Dürer)의 < 멜랑콜리아(Melencolia, 1514) >에 등장하는 천사는 매우 심난한 표정이다. 그의 주변에는 다양한 도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작품의 제목처럼 ‘우울’해 보이기보다는 지극히 ‘심난’해 보인다. 턱을 괴고 한 손에 컴퍼스를 쥐고 있는 그는 ‘이 도구들을 어쩌지’라고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에는 이 천사 외에 두 명의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고민하는 천사 옆에 있는 아기 천사 외에도 또 한 명의 숨은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이카루스(Ikarus)이다. 천사의 저편에 있는 바다에는 이 그림의 제목인 ‘멜랑콜리아’라는 글이 보이고, 바다에는 무엇인가 삐죽이 나와 있다. 그것은 스스로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태양의 근처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하고자 한 이카루스인 것이다. 좀 더 태양에 가까이 가기 위해 자신을 끝없이 확장시켰던 이카루스의 몰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속의 두 인물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 등장할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지극히 우려하는 입장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몰락도 모르면서 끝없이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뒤러의 이 작품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멈추지 않는 한, 심난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천사 그리고 더 튼튼한 날개를 만들어 좀 더 높이 날고자 하는 이카루스는 ‘지금 여기’도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2019년 < 멜랑콜리아 >는 과연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2019년 ‘지금 여기’에서의 천사 주변에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없을 것이다. 천사도 더 이상 심난한 표정을 하지 않고, 턱을 궤고 있는 대신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정신없어 무엇인가를 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문제로 인식한 것의 답을 찾기 위해 무엇인가를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 대신 검색이 사유 대신 내려받기(download)가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모습도 아마도 다르게 묘사될 수 있다. 그 또한 손에 스마트 폰을 쥐고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거나 또는 예전처럼 그대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물론 추락하는 이유는 이전과 다를 것이다. 스마트 폰에 집중한 그는 그것이 주는 세계 외에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이런 이카루스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길에서 스마트폰과 이어폰으로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걷고 있는 이들이 바로 2019년의 이카루스다. 그런데 다가올 미래의 이카루스는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다. 그의 운명 또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다. 2019년을 넘어 미래의 이카루스는 첨단과학기술의 도움으로 확장된 몸을 갖게 되며, 이 확장된 몸을 가지고 끝없이 날아오를지도 모른다. ‘아이언맨’이 바로 현대의 이카루스인 것이다. 이카루스에서 아이언맨으로, 이는 아마도 인간이 추구한 ‘포스트-휴먼(post-human)’의 역사일지 모른다. 확장된 감각과 몸을 가진 새로운 인간이 등장한 것이다.
2. 확장된 감각 그리고 불안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다른 감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이미 모두 포스트-휴먼이 되는 단계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사이보그의 모습으로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살아있는 동안 다양한 장치들을 사용해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고 있으며, 다양한 보철기기들을 사용해 우리 몸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을 넘어 몸의 확장 시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 확장된 몸을 가진 포스트-휴먼의 존재방식도 이전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초연결사회이며, 이 사회 속에서는 우리는 언제든 원격현전(Telepresence)으로 살아갈 수 있다. 초연결사회와 원격현전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항상 ‘텔레커뮤니케이션(Telecommunication)’이 가능하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텔레마틱(Telematic)한 사회가 온 것이다. 항상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혼자라는 존재방식이 주는 불안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제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결사회, 원격현전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텔레커뮤니케이션은 우리를 또 다른 불안과 강박으로 내몰기도 한다. 연결가능성은 이미 연결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이 되었다. 쌍방향적인 통화가능성은 어느덧 일방향적으로 되고 말았다.

홍순철 작가가 진단하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다양한 매체들로 인해 확장된 감각의 세계 속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이야기한다. 그는 늘 연결될 수 있는 지금의 매체 상황 속에서 오히려 불안과 고립감을 이야기한다. 재미있게도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일찍이 그리고 오랫동안 매체가 매개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는 매체가 매개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매체는 그의 머리이자 손이었으며, 매체가 만든 세상은 그의 현실이었다. 그랬던 그가 확장된 감각의 세계에서 느꼈던 불안, 고립감 그리고 감각의 마비를 에둘러 말하지 않고, 그대로 말한다. 우리는 지금 확장된 감각의 시대에 살고 있음과 동시에 감각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이다. 오감중 하나의 감각이 유난히 확대되면, 다른 나머지 감각들은 축소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하나의 감각이 유난히 확대되면, 다른 감각들은 마비될 것이다. 마샬 맥루언(Marshall McLuhan)이 말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맥루언은 감각들이 마비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마비의 단계에 이르기 전에 확장되는 감각들을 스스로 절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절단을 통해 하나의 감각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감각의 세계 대신 오감이 작동하는 공감각의 세계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홍순철 또한 매체로 인한 감각의 확장과 축소 그리고 일부 감각들의 마비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야말로 절단이 필요한 때라고 인식한다. 그 결과 그는 또 다른 감각으로서의 ‘육감(6 Sense)’을 이야기한다. 또 다른 감각으로서의 ‘육감’은 확장된 감각의 세계에서 잃어버린 감각이 복원된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감각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복원하고자 하는 감각은 매체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비매개적 감각(immediated sense)’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매체에 의해 ‘매개된 감각(mediated sense)’에 익숙한 그에게 새로운 감각은 비매개적 감각일 것이다. 비매개적 감각에 의한 또 다른 감각적 체험은 그에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는 나주의 ‘숨은 숲’에서 우연히 그의 모든 감각들이 확 열리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그 어떤 매개도 없이 오감의 자연적 확장을 체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비매개적 지각을 다시 ‘매체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타인과 공유하려고 한다. 그는 다시 ‘매개적 감각’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단순 회귀는 아니다. 매개와 비매개적 감각에 대한 체험을 통해 그는 확장된 감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감각이 확장되는 동안 마비된 감각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다시 매개적 감각이 만들어내는 동굴 안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깨달은 비매개적 감각을 매개적 감각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말이다.
3. 사회적 감각의 복원
홍순철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매개와 비매개간의 변증법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우연히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은 장소인 나주의 작은 숲을 매체 공간으로 형상화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나주의 작은 ‘숨은 숲’에서 되찾은 것은 잃어버린 감각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간에 대한 감각과 기억도 되찾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1989년 그가 형상화했던 <안양천의 검은 강>에 대한 기억을 상기할 수 있었으며, 그 기억을 2019년에 다시 형상화하고자 한다. 1989년이라는 시간과 검은 강이라는 공간을 동시에 다시 소환하는 것이다. 그는 결코 의지적으로 이 기억을 상기한 것은 아니다. 이 기억은 그에게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었다. 무의지적 기억이 소환되는 계기는 늘 우연적이다. 느닷없이 마주한 사건들을 통해 충격을 받고,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 과거가 갑자기 현재화 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우연히 먹게 된 마를렌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갑작스럽게 소환되듯이, 홍순철 작가의 검은 강에 대한 기억도 우연히 소환된 것이다.

홍순철 작가에게 검은 강은 80년대에 경험한 안양천이라는 실재 존재하는 강임과 동시에 관념의 강이기도 하다. 그에게 실재의 검은 강은 과거 도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위적으로 형성된 도시공간을 둘러싼 각종 자본주의적 욕망이 충돌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달았다. 이 공간이 결코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실재의 가상성을 은닉하기 위해 가상을 가상처럼 작동시키는 전략 말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사실은 특정한 공간에서만 자본주의적 욕망이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공간에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한다. 이를 숨기기 위해 특정 공간만을 그렇게 표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홍순철 작가는 경쟁과 욕망 그리고 폐기된 도시 공간 등등이 관념의 검은 강으로서 우리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그는 검은 강에 대한 기억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랬던 그에게 4년 전 우연히 만나게 된 나주의 작은 숲과 그 숲 주변을 둘러싼 상이한 자본주의적 욕망의 지형도 속에서 1989년의 검은 강이 ‘무의지적’으로 소환된 것이다. 그는 이를 다시 현재화하고자 한다. 나주의 작은 숲에 의해서 소환된 검은 강의 기억은 일종의 사회적 감각이다. 그리고 이 감각은 무뎌졌다. 그는 이러한 감각 또한 되찾고자 한다.

홍순철 작가가 2019년 다시 검은 강을 소환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감각에 대한 복원을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9년 검은 강은 나주의 숨은 숲과 공존하면서, 잃어버린 사회적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나주의 숨은 숲은 사실 숲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애매하다. 우선 이 공간은 우리가 숲이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도시에 존재한다. 그것도 상이한 특성을 가진 두 공간들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않은 ‘또 다른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이 숲은 도시적인 것과 비도시적인 것 그리고 상이한 욕망들이 충돌하는 그 사에 존재한다. 마치 틈새처럼 작용하는 그 숲은 일종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볼 수 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헤테로토피아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그래서 공존이 불가능한 여러 공간들이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진 공간을 의미한다. 홍순철 작가에게 나주의 숨은 숲이 바로 헤테로토피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는 양립 불가능한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작은 숲에 여러 층으로 겹쳐진 것들을 본 것이다. 그는 이 공간을 마치 지질학자처럼 읽어간다. 공간의 단면을 절단하고, 층층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읽어나간다. 인간과 자연, 원주민과 이주민,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들의 상이한 욕망 등등을 읽어나가고 있다. 오랜 독서의 과정을 끝낸 그는 자신이 읽은 내용들을 다시 전시공간으로 옮기려고 시도한다. 나주의 숨은 숲 그리고 검은 강을 다시 타인들과 공유하려고 한다. 사회적 감각의 복원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는 매체에 의해 확장된 감각이 가져온 다른 감각에 대한 마비와 불안을 다시 매체화된 형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이 감각 또한 매체에 의해 매개된 감각으로 형상화한다.
4. 혼합현실이 된 < 검은 강과 숨은 숲 >
전시공간으로 옮겨진 ‘검은 강과 숨은 숲’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시공간의 체험을 하게 한다. 이 공간은 한 마디로 말해서 ‘혼합현실(mixed reality)’이다. 그렇다면 무엇과 무엇이 혼합되었단 말인가? 그것은 가상현실과 실재현실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주의 숨은 숲은 전시공간에서 매체에 의해 실시간으로 전송된다. 전송된 숲은 일종의 매체공간이 된 것이다. 검은 강은 전시 공간에서 현전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실재이다. 그러나 이 검은 강은 과거의 검은 강이다. 과거의 검은 강이 다시 매체를 통해 현재화된 것이다. 지금과 여기를 둘러싼 전통적인 관계는 이미 깨진지 오래다. 매체공간에서의 원격현전은 지금이라는 현재적 시간을 확장해 ‘지금-거기’라는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매체공간에서의 원격현전의 등장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원격현전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지금과 여기의 연관관계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원격현전은 지금이라는 시간을 여기라는 공간에 한정하지 않고, 저기라는 공간까지도 현재 안에 가둔다. 매체는 이전과는 다른 공간을 만들었다. 가상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반드시 매체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끊임없이 가상과 혼종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가상현실과 실재현실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 둘 간에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실재현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혼합현실이었던 것이다.

홍순철 작가 또한 이미 매체현실과 실재현실 모두 혼합현실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가 생각하는 혼합현실은 단지 공간만이 혼종화된 현실이 아니라, 시간마저도 혼종화된 현실이다. 지나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가 혼합현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만남을 그는 인위적 공간에서 다시 매체적으로 구현하려고 한다. 감각의 확장을 체험한 나주의 숨은 숲을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전시공간으로 옮기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는 숨은 숲만 전시공간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시공간에 ‘검은 강’도 구현한다. 검은 강은 숨은 숲처럼 실시간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검은 강은 실시간으로 구현될 수 없는 과거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을 둘러싸고 중첩에 중첩이 만들어진 것이다. 실재공간의 가상화, 가상공간의 실재화, 과거의 현실화, 과거와 현재의 동시화 등등이 그의 가상화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작업 공간은 ‘실재와 가상현실’이 혼재된 공간이다. 다양한 시공간이 혼재되어 있는 현실이 우리가 지금 실재하는 세상이다. 혼재된 시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온전하고 예민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회복된 감각은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자각시켜주며, 더 나아가서는 내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시공간과 조우하고 있는가를 알아낼 수 있는 길을 당신에게 선물할 것이다.”

그렇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궁극적으로 시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회복된 감각들 간의 만남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여기와 거기 사이에서 얽혀있는 혼합된 현실의 실체의 민낯. 이를 통해 우리는 아마도 그가 말하는 ‘육감(6 Sense)’를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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