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보다 귀한 향이 흐르고
밤마다 이야기가 반짝거리는

《17세기 몬순의 기억, 오랜 잠에서 깨어나다》

황금은 시대를 관통하며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여기, 황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이 있으니, 대항해 시대의 정향과 육두구였다.

14세기, 유럽과 아시아를 잇던 실크로드가 막히며 향신료 가격이 급등했다. 유럽의 열강들은 앞다퉈 바닷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인도 대륙을 돌며 후추를 독점했고, 스페인은 콜럼버스를 통해 인도 대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17세기 대항해 시대에 후발주자였던 네덜란드는 이에 질세라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하며 향신료 무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여기까지가 강자의 편에서 기록된 세계사다.

그런데 잠깐. 이 이야기의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강자도, 약자도 아닌, 제삼자의 시선으로 말이다. 이곳은 17세기 조선이다. 네덜란드의 한 유명한 항해사가 정향과 육두구를 배에 가득 싣고 고국으로 향하던 길에 풍랑을 만나 조선에 표류했다. 갈색 고수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이 남자는 왕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는, 호주머니에서 향신료 한 줌을 꺼내 왕 앞에 내밀었다. 당신이 남자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조선의 왕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코끝을 스치는 쌉싸름한 냄새에 눈이 번쩍 떠졌을 것이다. 조선에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이국적인 향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마음을 더 사로잡은 것은 그가 손가락으로 그려 보인 미지의 세계, 해상 실크로드다. 인도와 중국의 문명이 만나며, 바깥 세계에 열려있는 곳. 금보다 귀한 향이 흐르고, 밤마다 이야기가 반짝거리는 항구도시. “그곳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왕의 물음에 푸른 눈의 항해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몬순을 따라가야 합니다.”

‘몬순’은 거대한 티베트고원에서 시작된 대륙풍과 인도양 해풍 간의 온도 차가 만들어내는 계절풍이다. 만약 21세기 대한민국에서 17세기 몬순을 따라 항해를 떠날 수 있다면 어떨까?

올해 새롭게 개편된 ACC 아시아문화박물관의 첫 번째 상설 전시 《몬순으로 열린 세계 : 동남아시아의 항구도시》에는 과거 아라비아 상인들이 계절풍 ‘몬순’의 특성을 이용해 바닷길을 오가며 꽃피운 항구도시의 문화와 이야기로 가득하다. 2017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네덜란드 델프트 헤리티지와 협약을 통해 수증 받은 ‘누산타라 컬렉션’ 중 400여 점의 아시아 유물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예로부터 인도인에게 황금의 땅 ‘수완나부미(Suwarnabhumi)’라 불린 동남아시아 항구도시, 그 찬란한 낮과 밤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출항의 설렘을 가득 담은 프롤로그 공간을 지나, 1부 ‘몬순 항해, 닻을 올리다’에서는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실은 선실 공간이 펼쳐진다. 여기서 보물이란 금보다 귀한 정향과 육두구라는 향신료이다. 목숨을 건 항해였기에 무사 귀환을 바라는 주술적 의미의 수집품도 있다.

2부 ‘항구도시가 빚은 문화유산’에서는 배를 정박하고, 현지 땅을 밟는 경험을 선사한다. 황금의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신을 섬길까. 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까마산 그림에는 인도네시아의 토착 캐릭터인 광대 ‘뿌나까완’이 등장한다. 밤에는 공중에 흔들리는 등불에 비춰 그림자 인형극이 펼쳐지고, 로컬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는 가믈란 악기 연주가 이어진다. 해가 뜨면 라탄으로 짠 바구니를 손에 든 여인들이 지나가고, ‘끄리스’라는 단검을 분신처럼 몸에 지닌 남자들이 담배를 태우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3부 ‘쁘라나칸, 변화의 바람’에서는 현지에서 사귄 친구의 신혼집에 초대받은 상상을 해본다. ‘쁘라나칸’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친구는 외지에서 온 상인 아버지와 현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중국계 쁘라나칸인 그의 신혼 방에는 화려한 혼수용 장식장과 중국풍의 놀이용 탁자가 있다. 탁자 위에는 조금 전까지 한 듯 보이는 카드놀이(체리키)가 놓여있다. 친구는 웃으며 이렇게 묻는다.

어떤가 친구, 이 황금의 땅을 여행한 소감이?

17세기 향신료를 찾아 떠난 탐험가로, 네덜란드의 항해사를 마주한 조선의 왕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무엇보다 과거의 시간에 손을 뻗어 현재를 살아갈 지혜를 손에 꼭 쥐고 돌아오길 바란다. 변하지 않는 가치는 그곳에 있다.





by 송재영
tarajay@naver.com
사진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문화 전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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