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틱, 인도네시아의 정신을 담은 의상

아시아문화칼럼

인도네시아 바틱의 등장과 발전

아시아문화박물관 상설전시 <몬순으로 열린 세계> 중 바틱 전시장

바틱batik은 옷감을 다양한 색과 문양으로 물들이는 염색의 방식 중 하나이다. 이 기법은 지방(유지)이 주성분이며 천연 방수제로 쓰이기도 하는 밀랍을 옷감의 특정 부분에 칠하여, 염색 과정에서 염료가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렇게 염색을 막아 옷감의 바탕색이 그대로 남은 부분은 이후에 새로운 색으로 다시 염색하거나 그대로 남겨 두어 무늬를 표현하는 데에 쓰인다.

<몬순으로 열린 세계> 전시 중인 치마형 하의인 까인 빤장kain panjang으로 20세기 초반 자와 지역 수집품이다.
상하와 좌우가 모두 진한 붉은색과 파란색의 대비를 이루도록 정교하고 섬세하게 염색한 바틱 의상이다.

이러한 바틱이 정확히 어느 곳에서 기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기법이나 재료의 차이는 있지만, 유럽, 이집트,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염색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염색 기법을 뜻하는 명칭인 ‘바틱’은 명백히 ‘자바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이를 대표하는 지역이 인도네시아, 그중에서도 자와Java 지역이기 때문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박물관의 <몬순으로 열린 세계> 전시에서 선보이는 바틱도 모두 인도네시아의 자와섬에서 만들고 수집한 것이다.

18세기 인도 구자라트 지역에서 제작한 파톨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www.metmuseum.org)

인도네시아의 바틱의 기원은 미리 염색해 둔 실을 이용해 문양을 직조하는 이캇ikat 방식의 인도 견직물인 파톨라patola를 염색 기법으로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특히 인도 서부의 구자라트Gujarat주에 속한 파탄Patan 지역의 파톨라는 전체적인 직물의 구성이나 문양, 심지어 용도까지 인도네시아의 바틱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인들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문양, 새로운 표현 기법, 열대의 자연에서 얻은 천연염료를 이용한 다채로운 색을 자신들의 바틱에 적용하였다. 그렇게 하여 파톨라와는 다른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직물 염색 공예를 완성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독자적인 바틱 문화는 자와의 마따람Mataram 술탄국이나 이를 이은 욕야카르타Yogyakarta 술탄국, 그외 자와섬의 여러 왕가와 귀족층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몬순으로 열린 세계> 전시 중인 빠랑 루삭 문양의 까인 빤장과 그 문양 세부. 20세기 전반 자와 지역 수집품이다.
바틱 기법을 이용하여 염색 한 뒤, 금가루를 덧칠하여 장식성을 높인 작품이다.

숙련된 바틱 장인들은 왕실과 귀족 집안에 소속되어 기존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편, 새로운 도안과 색을 실험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중화와 상업화 역시 함께 진행되었다. 바틱은 관료 및 전사 계층, 부유한 상인, 그리고 일반인이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때에 입는 의상 등으로 점차 다양한 계층에서 소비되었다. 그 과정에서 특정 집단이 일부 문양을 독점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빠랑 루삭parang rusak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금지된 문양'은 마따람 왕실과 그 혈통을 이은 일부 귀족층의 전유물로 쓰였다. 특정한 문양에 대한 금기와 금지가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왕실의 의복 문화를 모방하려는 하위 신분층의 욕구가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틱, 아주 이른 세계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지역에 처음 진출한 17세기 이래로 자와섬 북부의 해안에 접한 바따비아Batavia를 중심으로 좁은 거점 정도만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해산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직접 지배를 진행했다. 이를 위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역사‧문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프랑스의 파리 동양어학교를 모방한 전문 교육기관들을 설립하게 된다. ACC 소장 누산타라 컬렉션의 기원이 된 델프트시의 인도연구소도 그런 기관 중의 하나였다. 역사학‧인류학‧고고학 등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한편, 이를 기반으로 식민지에 배치될 관료들의 교육을 진행하였다.

이렇게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소산들이 네덜란드에 직접 소개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졌다. 이후 자와를 소개하는 그림 속에는 의복의 묘사에 바틱의 문양이 표현되기 시작했고, 직물 판매를 위한 팜플렛 속에도 바틱이 등장했다. 자와의 바틱은 그 실상과는 상관 없이 네덜란드령 인도The Netherlands Indies의 의복 문화를 대표하는 특산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바틱에 대한 국제적인 수요를 불러왔다.

이 시기 바틱의 상업화를 이끈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자와에 진출한 중국인이었다. 19세기 중반 무렵 유력한 중국인 자본가들이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던 바틱을 공장제 수공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문양과 색에 더해 주문자인 유럽인의 취향을 반영한 새로운 문양과 색을 선보였으며, 화학 염료의 도입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토착 생산자들도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자본력과 인력 수급에서 중국인들의 경쟁자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들의 경쟁 관계는 심각한 갈등으로 발전하여 20세기 초반에는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바틱의 생산 과정에는 선대제에 가까운 전근대적인 모습도 일부 있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인도네시아의 바틱은 명백한 '근대 자본주의'의 맥락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다.

미국 남부의 목화 농장에서 아프리카계 노예가 딴 목화는 미국 북부와 유럽의 방직 공장으로 팔려나갔다. 서구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면직물을 실은 기선이 인도네시아 북부의 항구 도착하면, 중국인인 쿨리cooli가 하역하여 바틱 공장으로 가는 수레에 옮겨 쌓았다. 이 면직물은 분업화된 공정이 적용된 공장에서 다양한 색의 염료로 염색되었고, 이렇게 완성된 바틱은 다시 쿨리에 의해 운반‧선적되어, 전세계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팔려나갔다. 그렇게 인도네시아의 바틱은 거대한 세계 자본의 흐름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의 바틱과는 결을 달리하는 이 현대화된 바틱은 당시의 세계인들에게 인도네시아의 바틱을 체현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몬순으로 열린 세계>에 전시 중인 자와 북부 쁘깔롱안에서 생산한 바틱. 전형적인 꽃다발 모양 바틱의 예에 해당한다.

그 과정에서 바틱은 사롱sarong(치마)이나 슬렌당slendang(숄)이나 스카프과 같은 전통적인 의복 형태에서 화려한 문양이나 회화적 요소를 가진 실내 장식품, 식탁보, 염색 옷감의 형태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자와 북부의 쁘깔롱안Pekalongan 지역에서는 유럽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한 화려한 꽃이나 식물류 등을 중심으로 하는 꽃다발 모양 바틱, 혹은 바틱 뇨냐로 불린 직물이 생산되어 전세계로 수출되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 자와어에서 유래한 ‘바틱’이라는 말은 밀랍을 방염제로 사용하여 여러 차례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문양을 가진 직물을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다양성, 바틱 안에서 통합되다

20세기 초반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윤리 정책’을 재가하였다. 그에 따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인에 대한 폭압적 통치를 수정하여 복지와 교육, 제한적이지만 법적 권익의 보호 등을 명문화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러 왕국과 섬, 각기 다른 부족으로 분리된 인도네시아를 ‘하나의 상상된 동일체로서의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규정하고 그 문화와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의복문화로 ‘바틱’이 조명된다.

서구화된 복식을 입은 남성의 곁에 전통적인 바틱 의상을 입은 여성이 함께 서 있는 이 시기의 사진은 ‘여성’이라는 대상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바틱이 인도네시아의 ‘고유하고’, ‘역사적인’ 문화적 요소로 자리 잡게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틱은 자와라는 한계를 벗어나 인도네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적 코드나 자긍심의 하나로 점차 수용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 정부 주도의 근대 교육과 각종 매체를 통한 민족주의 계통 지식인들의 권위 있는 ‘전통성’에 대한 해석이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는 언어를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도 함께 진행되었다.

1949년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는 이렇게 하나의 통합된 인도네시아라는 ‘식민지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 ; 비네까 뚱갈 이까’)을 내세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와라는 제한적인 공간을 바탕으로 성장한 자와 바틱은 일약 ‘인도네시아의 정신’을 담은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의복문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하여 현대 인도네시아에서 바틱은 그들의 고유한 문화, ‘인도네시아성’을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의 하나로 간주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바틱을 ‘인도네시아적인 것의 전형’, ‘국민적인 의상’, ‘자와의 영혼’, ‘인도네시아의 정신’ 등으로 표현하며, 전통 의상이나 직물 염색 기법의 차원을 넘어 국민적 통합 요소의 하나로 평가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바틱은 ‘자와’라는 지역적·종족적 한계를 갖는 문화이기도 했다.

수하르또 대통령과 바틱의 재발견

1970년 4월 6일 바틱 셔츠를 입고 서부와 중부 자와 순시 중인 수하르또 대통령. ⓒWikimedia Commons

식민지 시기 동안 바틱은 남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적인 것, 혹은 서구적 양복을 입은 ‘계몽된’ 남성의 모습에 대비되는 여성의 전통적이고 ‘재래식한’ 착용물로 인식되곤 했다. 반면, 남성들은 공식적인 장소에서 서구의 셔츠와 바지를 입기 시작했으며, 이는 점차 식민지 공간의 공식 의상으로 자리잡았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직접 지배가 완성되어 가던 190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에서 남성은 서구화된 바지와 수트가 여성은 바틱 사롱에 끄바야를 입는 것이 공식 의상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바틱이 ‘여성성’을 극복하고 인도네시아 대중 모두의 의상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되는 데에는 수하르또Soeharto, 1921~2008 대통령재임 1968~1998의 공이 컸다. 그는 전임자인 수까르노Sukarno, 1901~1970 대통령재임 1950~1967이 재임 기간 동안 공식 석상에서 단 한 번도 바틱 의상을 착용한 적이 없는 것과는 달리, 부인인 시띠 하띠나Siti Hartina, 1923~1996와 함께 국내외 행사에 바틱 의상을 입고 참석하였다. 이러한 수까르노의 노력에 부응하여, 1972년 7월 자카르타 주지사인 알리 사디낀Ali Sadikin, 1926~2008이 바틱을 공식 남성 의상으로 지정하는 조례를 만들었고, 이는 점차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 나갔다. 또한 네덜란드 지배 이래 서구화된 복식을 교복으로 착용했던 학교들도 점차 바틱 의상으로 교복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 바틱 의상은 교육 및 국가 의례, 관공서 등 공적 공간, TV 등의 매체를 통해 자주 노출되었고,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익숙하고 친근한 ‘고유 문화’가 된다. 특히, 국가적 의례의 한 장면에서 연출되는 최고 정치적 결정자의 바틱 착용은 그에 대한 새로운 권위를 부여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바틱의 문화적 기원인 ‘자와’는 점차 망각되고 ‘인도네시아’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를 교육 내용이나 문학적 소재로 다루게 되면서 바틱은 다른 주변 국가들이 갖지 못한 인도네시아만의 정체성의 근간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오직 인도네시아의, 인도네시아만의 ‘바틱'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Bogor에서 수하르또가 주최한 에이펙APEC 정상회의는 인도네시아 바틱의 역사에서 또 다른 획기가 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바틱 패션 디자이너 이완 띠르따Iwan Tirta, 1935~2010에게 의뢰하여 회의에 참가한 16개국 정상과 2개국의 경제 각료를 위한 의상 제작을 주문했다. 이완 띠르따는 각국의 문화적 전통과 상징을 바틱 도안 내에 재해석하여 18개의 각기 다른 문양으로 바틱 셔츠를 디자인했다.

당시의 회의에는 주최자인 인도네시아의 수하르또 대통령을 비롯,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 등이 참석하여 국제적인 관심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회의 당일인 1994년 11월 15일, 각국 정상들이 이색적이며 화려한 바틱 셔츠를 공식 석상에서 입은 모습이 대중매체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사건으로 바틱은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번영을 위한 계획을 담은 보고르 선언The Bogor Declaration의 내용만큼이나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1994년 에이펙의 바틱 이벤트는 여러 국가, 특히 말레이시아 및 인도의 바틱과 경쟁하던 인도네시아의 바틱이 국제적 주도권을 잡는 데에 큰 기여를 한다.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에이펙 정상회담에 참가한 아시아-태평양 국가 지도자들. ⓒAPEC(www.apec.org)

2009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인도네시아의 바틱Indonesian batik’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단독 등재하였다. ‘바틱’은 다양한 국가에 걸쳐 각기 독자적인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 직물공예이다. 특히, 상당 기간 동일한 문화를 공유한 말레이시아는 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아, 등재를 두고 인도네시아와 경쟁하는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공동 등재가 아닌 ‘단독 등재’에 성공했다. 그렇게 하여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바틱에 대한 ‘독점적, 배타적’ 권한을 대내외적으로 공인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날(10월 2일)은 인도네시아 국립 바틱의 날National batik day이 되었다. 바틱에 인도네시아의 ‘하나된 영혼’이 담겨 있다는 인식은 이제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단계로 나아간 듯하다.

참고 자료
최승연, 「실과 베틀로 옷감을 짜다」, 전남대학교출판부, 2014.
이지혁, 「바틱으로 보다: 자바, 인도네시아 이야기」, 세창출판사‧ACC, 2018.
진 테일러, 여운경 역,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역사들」, 진인진, 2023.

 

 

 

 

by
배재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Photo
ACC 제공
공감 링크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