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찬란함의 무덤> 중간 즈음, 젠지라 퐁파스는 미국인 남편과 함께 '두 여신의 신전'에 기도를 하러 간다. 젠지라는 자신의 아픈 다리를 위한 치타, 튼튼한 사지를 위한 긴팔원숭이, 새 아들 ‘이트’의 기운을 위한 호랑이 인형들을 바친다. 이트는 영원한 기면(嗜眠)의 병에 전염된 군인들 중 하나로, 젠지라가 돌봐주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묻는다. “우리한테 아들이 생겼어?”
그녀는 대답한다. “네, 좋은 사람이에요. 나라를 위해 일해요. 당신은 외국인이라 이해 못할 거예요, 여보.”
젠지라가 이 말을 날리자 칸느의 드뷔시 극장에서는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외국인이라 이해를 못할 거라고? 이해해요, 사실 굉장히 많이. (글쎄, 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나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들이라면 다를지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이 빛나는 신작에서 나라에 관한 유머, 우아한 형식주의, 그리고 현실과 허구, 꿈과 현실, 역사와 기억, SF와 미신 사이에 놓인 담벼락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칸느의 비평은 거의 단 하나도 없었다. 그 목소리들은 버려진 시골병원에서 발견된 찢어진 일기 속 슬픔에 담긴 나른한 아름다움을 이해했다. 그리고 아피찻퐁의 모든 영화는 그의 다른 작품들이 굴절된 형태이자, 그가 가진 여러 두려움과 집착, 충동, 어린 시절, 환영, 희망을 자유연상으로 재치 있게 재구성한 것이라는 것 역시 이해했다. <찬란함의 무덤>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실제 간, 영화와 진실 간의 장벽 해체는 너무도 완벽해서 '다 비슷비슷하다'고 치부하는 무지한 비판으로는 그가 성숙하게 다듬어놓은 미학을 보는 데 처참히 실패한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다 이해하긴 했지만, 여전히 또 하나의 층, 또 다른 지하 무덤이 존재한다. 이 작품을 전작들과 구별 지어준다고 보는 부분인데, 바로 영화의 모든 프레임을 채우다시피 하는 강하고 명백한 사회적 요청이다. 시간의 영역을 벗어난 듯한 원초적 배경의 <찬란함의 무덤>은 그 하나부터 열까지 현재에 관한 영화이다. 즉, 군부가 통치하는 쿠데타 이후의 2015년 태국, 우리가 깨어나보려 애쓰며 악몽에 갇혀있는 장소다. 또한 정치적 목소리를 죽여야 하고 시인이 살해되며 예술가들이 협박을 당하거나 수감되기까지 하는 조지 오웰적인 부조리의 장소다.
<찬란함의 무덤>은 수수께끼 같은 회상과 진심 어린 아름다움 가운데 군부지배의 태국이 처한 (정치적, 개인적, 역사적) 불확실성에 응답하는 최초의 태국영화다. 이 어두운 예언이 너무나 부드럽고 교양 있는 방식, 그러면서도 명민하고 확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더욱 놀랍다.
아피찻퐁의 영화들에서는 항상 차분한 겉모습 바로 밑에 전복적인 긴장이 흐른다. (<친애하는 당신>의 태국-미얀마 국경문제, <열대병>의 불길한 동성애, <엉클 분미>에 등장한 태국 북동부의 공산주의 과거.) 이런 불안과 평정 사이, 축복과 고통 사이의 마찰이라는 구조적 요소는 그의 작품에 심원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이번 신작에서는 사회적 억압의 공기가 아피찻퐁이 가진 꿈 연금술의 용해액을 뜨겁게 데우면서 긴장을 고조한다. 이중적 언어, 상징주의, 유머, 아이러니, 은유적 명료함은 현대 태국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점철되어 있다.
<찬란함의 무덤>의 중심적 은유의 형태는 잠을 자면서 고대 왕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 영혼을 빼앗기고 있는 군인들이다. 여신들이 젠지라에게 전한 이 우화는, 물론 군주와 군대의 역할이 많은 논쟁(과 범죄 혐의)을 불러일으킨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기도 하지만, 보다 태고적인 측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엉클 분미>가 공산주의 시대 북동부 지역이 겪은 역사적 상처를 가리켰다면, 이번 작품은 그 유산에 담긴 보다 깊은 문제, 특히 최근 몇 년간 강화돼 온 국가 건립의 프로파간다를 성찰한다. '국가, 종교, 왕정'이라는 공식적 줄기들은 병원이 된, 망각의 실험실로 변모한 배움의 장소인 학교 천장을 보여주는 몇몇 쇼트에서 엿볼 수 있다.
젠지라가 긴 잠에서 막 깨어난 군인 이트와 병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한쪽 벽은 어느 장군의 거대한 초상화로 덮여있다. 이 사람은 프랑코 같은 독재자로 악명 높은 육군 원수 사릿 타나랏으로, 50년대 중반 권력을 잡았고, 그 이후 쿠데타가 있을 때마다 끔찍한 그림자를 드리웠던 인물이다. 빅 브라더는 물론 수많은 형제를 낳았고 이들 모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젠지라는 '스파이'에 대한 농담을 던지기도 하는데, 아피찻퐁은 이트의 일기장에 강렬한 에피소드를 슬쩍 끼워 넣었다. 말 많았던 모독죄 혐의로 수감되었던 정치범으로 2012년 비극적 죽음을 맞은 노인의 이야기이다. (아피찻퐁은 2년 전 로모키노 무비 단편 <재>에서도 이 사건을 퍽 에둘러 다룬 적이 있다) 그 일기에는 모르는 채 남겨두는 게 좋을 불가사의한 그림들도 있다.
말을 너무 조심스럽게 돌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당신은 외국인이라 이해 못할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 젠지라의 유쾌한 핀잔은 BBC, CNN, 뉴욕타임즈, 가디언을 비롯해 태국의 군부정치를 비판한 모든 국제언론에 가했던 만능 비난에서 그대로 따 온 말이기에 좀 더 어두운 함의를 띤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만연한 민족주의를 조롱하는 것으로 진보적인 외국인이라면 모두 웃어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점점 강하게 표방하고 있는 예외주의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태국 왕국은 너무도 독특해 태국인이 아니면 누구도 우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모든 비판은 무효하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단순한 농담에는 가슴 쓰린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아피찻퐁은 국내의 다소 꽉 막힌 이들에게 종종 외국인들을 위한 어려운 영화, 태국인들은 신경도 안 쓰고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는 아픈 아이러니다. 태국인이야말로 그의 영화가 지닌 가장 깊은 뉘앙스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피찻퐁의 고향이 있는 태국 북동부, 가장 가난하고 저개발 된 곳으로 알려진 이 지역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그 농담과 신화, 말투까지(나 역시도 대부분은 영어 자막에 의존해야 한다)도 가장 잘 이해해야 한다. 예외주의 카드를 내세우려는 건 아니다. 단지 <찬란함의 무덤>이 그 지역의 축축한 땅과 독특한 설화, 역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텔레파시의 영화’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찬란함의 무덤>이 태국 내에서 상영이 될지조차 확실치 않다.
하지만 정치사회적인 렌즈만으로 이 영화를 불균형하게 바라본다면 작품의 진정한 탁월함을 놓치게 된다. <찬란함의 무덤>은 젠지라의 실제 삶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아피찻퐁은 젠지라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와 기억들을 적어달라고 했다. 40년 전 고향 마을에서 전쟁 참호를 보았던 때부터 최근 미국 군인과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아픈 다리, 영화 역사상 가장 슬픈 그녀의 다리 트라우마. 그리고 이 디테일들이 감독 자신의 기억과 섞여 흐릿해지고, 혼합되고, 덧입혀졌다. 아피찻퐁은 칸느 영화제 전 내게 '영화에서 마치 젠지라가 나에 빙의된 것 같다'고 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진짜 전투가 등장한다. 영화의 여러 가닥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긴장감은 격동의 표면으로부터 친밀함이 떠오르는 방식이다. 개인적 기억, 기억의 자유, 눈을 뜨고 깨어날 의지, 젠지라의 고통과 아피찻퐁의 과거, 이 모든 것들은 세뇌와 국가적 최면의 구조적인 힘에 부딪히며 분투하고 있다. 국가-종교-군주의 기둥, 권력의 도상학, 빛나는 색조명이 군인들의 악몽을 쫓아내는 동안 병원에 깔리는 군가들, 젠지라와 영매인 켕이 긴 산책을 하던 숲 나무에 못 박아 둔 잠언들. <찬란함의 무덤>은 가장 온화한 전쟁의 절규로, 무정하고 지각없이 규정된 교리를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 하나하나의 의식과 손을 잡는다.
마지막 쇼트는 이를 너무도 아름답게 요약한다. 또한 그 분투가 계속됨을 암시한다. 굴착기가 과거의 무덤을 계속 파내려 가면, 젠지라는 현재를 보기 위해 꿋꿋이 눈을 뜨고 있다. 꿈은 찬란하나, 우리가 -이 곳에서, 그 곳에서, 모든 곳에서- 그 찬란함의 진정한 빛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오직 무덤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