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아시아-좀비 연대기
강보라, 〈아시아-좀비 연대기〉, 2022
미디어문화연구자 강보라는 연결성, 참여, 진정성 개념의 이론화에 관심을 두고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구조와 매개(mediation) 방식을 연구해왔다. 〈아시아-좀비 연대기〉는 좀비와 같은 비일상적인 대상이 인류의 욕망 및 인식론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 아래, 오늘날 좀비 콘텐츠가 어떤 동시대의 정신 표상과 맞닿아 있는지 탐구한다. <아시아-좀비 연대기>는 20세기 중반부터 최근까지 서구의 좀비 영상에서 시작해 아시아의 좀비 영상으로 시공간을 확장해가고 있는 영상 문화 속에 나타난 좀비물을 집대성하고 좀비라는 상상의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분석한다. 이로써 아시아의 좀비 상(相)이 서구의 좀비 상과 어떤 연속성과 단절을 나타내고 있는지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살피고, 동시대의 관점에서 좀비-성을 고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김봉수,〈웹 팬데믹〉
2채널 오디오, 5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김봉수,〈웹 팬데믹〉, , 작가 제공
그룹 무버(Mover), 우분투(Ubuntu)의 멤버로 활동하며 현대무용의 의미와 경계를 확장하는 데 천착해 온 현대무용안무가 김봉수는 영화, 드라마 등 각종 좀비물 제작에 안무가로 참여하며 좀비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바 있다. 퍼포먼스 〈웹 팬데믹〉에서 감각을 마비시키는 좀비파우더로 온몸을 칠갑한 무용수는 의지를 박탈당한 노예 같은 존재가 되고, 뒤틀린 채 삐걱거리거나 광기에 휩싸여 돌진하는 좀비의 몸짓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 작품에서 김봉수는 오로지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좀비의 모습을 미디어의 발달로 윤리적 퇴보를 겪는 오늘날의 현실과 연결 짓는다. SNS라는 경로를 통해 빅데이터라는 무기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횡행하는 가짜 뉴스는 진실을 전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망각한 채 편향적 사고를 가속화하고 있지 않은가. 비틀린 채 내달리는 우리의 모습은 좀비와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지 고찰할 계기를 제시한다.
문소현, 〈단지 좀비 일뿐〉
2022, 애니메이션 컬러 영상, 사운드, 8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작가 제공
문소현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스톱 애니메이션과 인형극의 형식으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트라우마·폭력·불안·욕망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단지 좀비 일뿐〉은 죽음과 불완전한 부활, 치명적인 전염성, 파괴된 신체, 무자비한 집단성 등 섬뜩하고 괴이한 존재로 여겨지는 좀비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작가는 좀비의 핵심이 배고픔이라는 단순명료한 욕망이라고 본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습득해야 한다는 강박과 어느새 닥쳐올지 모르는 위기에 대한 불안과 경계심을 자아내는 복잡한 현대사회를 벗어나, 마치 좀비처럼 강렬하고 뚜렷한 방향성을 지닐 수 있다면 더 행복하지 않을지 상상해본다. 오히려 좀비 상태에서 발견될 수 있는 행복하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작가의 상상은,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져 그간 좀비에 부여된 폭력성과 공포에 대한 감각을 현대사회의 우리에게로 방향 전환시키며, 우리 사회의 현실과 좀비라는 존재에 대한 재인식을 유도한다.
박성준, 〈press conference (new version)〉
2022, 인터랙티브 설치, 컴퓨터, 키넥트 센서, 스트로브 조명들, 무대 조명, 스피커4개, 테이블, 마이크, 4 채널 사운드, 가변설치, 4분 30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작가 제공
박성준은 영상, 인터액티브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를 통해 인간의 관념과 실재 사이의 부조리를 탐구해왔다. 영상언어를 해체하거나 조합해 실재와 다른 혼돈과 괴리의 공간을 보여주는 작가의 설치물은 무대 혹은 세트장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인간의 욕망과 불안, 갈등을 영화적 내러티브로 드러낸다. 〈press conference〉는 화자가 원하는 것과 청자가 믿고자 하는 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구조적 모순 속에 벌어지는 기자회견 모습을 인터액티브 설치로 재현한다. 이로써 부조리한 현 사회의 단면을 조명하고 동시에 그것이 다시 개인과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MONTAGE Ⅰ〉은 연쇄살인범들이 남긴 메시지가 재구성되어 들리는 내레이션과 갖가지 효과음 그리고 음악이 서로 어울려 공포를 조장하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빛바랜 일기 같은 그들의 메시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방정아, 〈핵 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
2022, 광목천에 아크릴, 1320×670cm,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작가 제공
방정아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민중미술의 전통과 여성주의적인 문제의식 아래 회화적 실천을 이어왔다. 전시장 출구에 자리 잡은 네 폭의 대형 걸개그림 〈핵 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는 폐허와도 같은 풍경 속 등신대를 훌쩍 넘어서는 좀비들로 가득하다. 탈핵운동가로서 각별히 탈핵운동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계속해온 작가에게 좀비는 핵에너지 사용이 초래하는 위험과 폐기물 처리 등 산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핵에너지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혹은 핵에너지로 인해 오염된 존재들을 표상한다. 동시에 작가는 좀비 군상 사이에 생존자들을 숨겨두고 관객들이 살아남은 이들을 발견해내기를 기대한다. 걸개그림 사이로 난 통로를 드나들며 좀비와 인간이 뒤엉킨 장면 속에 자리할 때 관객은 자연스럽게 핵에너지 사용에 관한 작가의 질문에 동참하게 된다.
여선구, 〈왕과 광대〉
1999, 채색 자기, 200×150×100cm,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소장품, 작가 제공
여선구는 광범위한 상징과 다채로운 색감으로 이루어진 표현주의적 인물 도자 조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재미 이주예술가로서 작가의 이력을 반증하듯 동양의 신화적 존재와 서구 대중문화 이미지를 넘나드는 혼성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도상들이 뒤엉켜 구성하는 부조리극의 형식을 빌려오기 때문에 사회·정치적 비평으로도 작동한다. 예컨대 광대 위에 올라탄 왕을 보여주는 거대한 도자 조각 〈왕과 광대〉는 계급갈등 또는 억압의 문제를 상징한다. 프랑스 혁명을 야기한 사회적 모순을 요약한 역사적 이미지는 <왕과 광대>에서 해골, 이빨을 드러낸 피라냐, 용 또는 해태를 연상시키는 신화적 동물과 함께 그로테스크함을 극대화한 채 재생산된다. 〈안식일의 기억〉은 작가의 무의식에 묻혀 있던 일상과 상상의 사건들을 보여준다. 여섯 개의 장면 속에서 동·서양의 종교와 설화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내면의 갈등과 이상향의 모습을 혼재된 상태로 드러낸다.
유소영, 〈Party of Sweets〉
2022, 초콜릿, 목재, 스틸, 모니터, 아두이노, 열전구, 200×200×200cm,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작가 제공
유소영은 데이터와 기계적 메커니즘, 그리고 물성을 결합한 비유적인 작품으로 사회적 부조리에 관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Party of sweets〉에서 작가는 달콤하고 화려한 초콜릿 분수를 아동 착취라는 무거운 현실을 다루는 기계로 변화시켰다. 호화로운 초콜릿 분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곧 그것이 손이나 발 같은 신체의 일부를 형상화한 초콜릿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거나 작업도구를 움켜쥐는 어린이의 노동하는 신체를 보여주는 이 조각들은 열 조명에 따라 녹아내리며 기괴한 형상으로 변해간다. 작가는 다국적 기업인 초콜릿 회사의 주식 데이터를 활용하여, 주가가 오르내림에 따라 조명이 작동하도록 이 장치를 고안했다. 그 결과 달콤하기보다는 일그러진 현실의 모습이 드러난다.
정명우, 〈너 죽인다〉
2022, 복합재료 설치, 2채널 비디오, 700×500×500cm, 20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작가 제공
정명우는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시각예술의 매체와 조건을 다양한 방식의 협업을 통해 탐구하는 한편,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 관심을 가지고 3D 가상공간, 페이크 텍스처 등의 기술적 도구를 작업에 활용해왔다. 〈너 죽인다〉에서 스티로폼을 사용해 인공적으로 구현된 무대와 함께 설치된 영상은 ‘비틀린 자’들의 출현으로 초소에 고립된 전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가 나누는 대화를 보여준다. 경계근무의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점차 극단으로 치달아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향해 내달린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좀비물의 클리셰에 기초한 〈너 죽인다〉의 서사는 친밀한 사람들 사이의 바이러스 전파 그리고 전염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격리 등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연상시킨다. 나아가 이 이야기에서 가까운 사람이 순식간에 죽여 마땅한 비체(非體,abject)로 전락하는 상황은 남북관계 이념 갈등에 의한 혐오와 적대라는 사회상을 은유한다.
촹 치웨이(莊志維), 〈다시 태어난 나무 연작: 리본 트리(광주)〉
2015, 모터, 낚싯줄, 나무, 가변 크기, 작가 제공
촹 치웨이는 빛과 공간을 활용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인터랙티브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태어난 나무 연작: 리본 트리(광주)〉는 기계적 합리성과 섬세한 감수성의 결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작가의 방법론을 잘 보여준다. 시간의 순환과 생명의 흐름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다시 태어난 나무 연작: 리본 트리(광주)〉는 꽃을 이용한 일본의 예술적 전통인 이케바나(Ikebana, 生花)를 참조한다. 작가는 이케바나에서 꽃이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듯, 기계 장치를 이용하여 대상에 인공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 저 멀리서 돌아가는 모터와 연결되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식물은 전기와 석유, 곧 산업 혁명 이후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신이 새로이 숨결을 불어넣은 것처럼 보인다.
후지이 히카루(藤井光), COVID-19 May 2020
2020, 싱글채널 비디오, 5분 49초, 작가 제공
후지이 히카루는 가시화되지 않은 사회적·역사적 쟁점에 대해 구조적으로 비평하는 영상 작업을 전개해왔다. 본 전시에서 선보이는 두 영상 작품 〈 COVID-19 May 2020 〉과 〈핵과 사물들〉은 공통적으로 재난으로 인해 폐쇄된 전시 공간을 다룬다. 〈 COVID-19 May 2020 〉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문을 닫은 도쿄현대미술관의 모습을 비춘다면, 〈핵과 사물들〉은 후쿠시마 제1원전 참사 이후 방사능 오염으로 폐기될 위험에 처한 후타바시역사민속박물관의 소장품에 대해 논한다. 이 작품들에서 역설적이게도 재난에 대한 경고와 파국에의 예감은 그 현장에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이 그것이 미술관 또는 소장품처럼 본디 보이기 위한 공간과 사물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이렇듯 드러나지 않은 재난의 현장을 포착함으로써, 재난에 대해 기억하고 논의하는 방식을 실험하고자 한다.
BCL, 〈세포 속의 유령 ― 합성심장박동〉,
2022, 2채널 비디오, 2채널 오디오, 가변설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작가 제공
BCL은 첨단 생명공학의 예술적 활용 가능성과 그것이 사회와 개인에게 미치는 윤리적 쟁점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두는 바이오아트 그룹이다. 〈세포 속의 유령―합성심장박동〉은 야마하가 개발한 음성 합성 프로그램 보컬로이드로 만든 가상 아이돌 하츠네 미쿠에게 살아 숨 쉬는 심장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부여하는 프로젝트다. 작가는 하츠네 미쿠의 팬들에게 생물학적 정보를 비롯하여 암호화된 메시지, 이미지, 음악을 포함하는 디지털 합성 DNA를 생성하도록 요청했으며, 그것을 분화줄기세포(iPS세포)에 주입했다. 심근 세포로 분화된 이 세포는 곧 스스로 뛰기 시작했다. 〈세포 속의 유령―합성심장박동〉은 하츠네 미쿠의 심장박동 영상과 그 심장박동을 구현하는 실시간 렌더링 과정을 함께 보여주며 데이터로 만들어진 존재와 생물학적 존재의 차이와 유사성, 그리고 데이터를 통한 실재의 생성 가능성을 질문한다.